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위험을 잊기 쉽다. 정작 상대가 나를 사랑해줄 경우에 그 사람의 매력이 순식간에 빛이 바랠 수 있다는 것이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59p
사랑은 영원하지 않다. 사실 영원해서도 안 된다. 최대 기한은 평생이면 충분하다. 천년이니 만년이니 일생을 초월해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가둬 둘 필요는 없다. 또한 한 사람만 사랑할 수도 없다. 살면서 사랑할 만한 사람을 오직 한 명만 만날 리가 없지 않은가. 그 모두와 사랑을 나누지 않는 이유는 현재 사랑하는 사람과의 의리 때문이지, 사랑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은 아니다.
그래서 '오직 너만을 영원히'라는 키워드는 괴롭다.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을 억지로 부정하기 때문이다. 혹자는 바람피우면 결국에는 괴로워진다고 하는데, 이는 누군가를 배신했다는 데서 오는, 정확히는 나쁜 짓을 했다는 데서 오는 괴로움이다. 이런 도덕적 굴레가 없을 때 '오직 너만을 영원히'라는 명제를 지키지 못했다고 하여 괴로워하는 경우는 없다. (자유연애주의자나 폴리아모리를 보라) 그리고 '오직 너만을 영원히'가 진리라면 '다음 사랑'이라는 개념이 성립할 수 없다. 재밌게도 사람들은 '오직 너만을 영원히'라는 명제를 다음 사랑, 그다음 사랑에 계속 요구하면서 그 명제를 어기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사랑이란 원래 불안정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사랑은 견고하지 않다. 동화 속에서 '오래오래 행복하게'로 퉁치는 기간 동안 사랑은 계속해서 변한다. 대부분 그 변화는 '식는다'는 과정을 거친다. 뇌 과학자들은 이를 호르몬의 변화로 설명하는데, 3년쯤 지나면 사랑할 때 분비되는 호르몬의 양이 줄어든다고 한다. 다만, 사랑이 식었기 때문에 호르몬이 줄어드는지, 호르몬이 줄어들었기 때문에 사랑이 식는 건지는 알 수 없다. 사랑은 시작할 때나 끝날 때나 똑같다. 이유는 모른다. 그냥 그렇게 되었다는 결과만 알 수 있을 뿐이다.
사랑이 변한다는 건 인정. 그런데 왜 그 방향은 거의 부정적인가? 시간이 지날수록 더 뜨거워질 수는 없는 걸까? 흔히 그 이유로 등장하는 것이 익숙함이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다. 뭐든 자주 보다 보면 익숙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또한 사람은 호기심의 동물이다. 미지의 것, 새로운 것에 흥미를 느낀다. 따라서 익숙한 것에 흥미를 잃는다. 그렇게 사랑이 식는다.
우리가 아는 또 다른 마르크스는 자신과 같은 사람을 회원으로 받아들여 줄 클럽에는 가입할 생각이 없다고 농담을 했다. 이 농담은 클럽 회원권과 마찬가지로 사랑에도 적용되는 진리이다... 클럽에 가입하기를 소망하면서 그것이 실현되자마자 그 소망을 잃어버리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막상 그녀가 나를 사랑하자 그녀에게 화를 내는 것은 어떻게 된 일인가?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67p
익숙함으로 인한 냉각과정의 정점이 <왜 너는 사랑하는가>에서 등장하는 '마르크스주의'가 아닐까 싶다. 공산당 혁명을 말하는 게 아니다. 희극인 그루초 마르크스의 발언에서 비롯된 사상이다. "나를 회원으로 받아들여 줄 클럽에는 가입할 생각이 없다." 이를 사랑에 적용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할 생각이 없다." 이 무슨 배은망덕한 소리일까? 하지만 이런 작태를 주변에서 발견하기는 어렵지 않다. 아나톨 프랑스의 말대로다. "우리가 이미 가진 것을 사랑하는 것은 관례적이지 않다." 그렇다. 인간은 잡은 물고기에 먹이를 주지 않는다.
그러다가 끝내 차이는 경우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잃고 나서야 소중함을 깨닫는 것도 인간의 종특이다. (그런 짓은 하지 말아야 했는데...) 다만, 자기가 흥미를 잃어서 냉랭해졌다가 차여 놓고는 비련의 주인공처럼 슬퍼하는 것만큼 우스운 꼬라지도 없다는 것을 명심하자. 차라리 애정이 식었으면 식었음을 인정하고 이별의 처분을 달게 받아들이자. 있을 때 잘하든가, 잘 보내주든가. 바지 가랑이 붙잡고 늘어지는 건 불쌍해보이지 절대 멋있지 않다.
우리가 생각해봐야 할 점은 잃고 나서 소중함을 깨닫는 경우가 있다는 점이다. 잡은 물고기에는 흥미를 잃어버리는 게 인간의 본성 아니던가? 하지만 동시에 인간은 소속감과 안정감을 원한다. '오직 너만을 영원히'라는 부조리한 명제가 자리 잡은 이유는 그것이 어느 정도 진실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인간은 잡은 물고기에는 관심이 없지만, 동시에 물고기를 놓치지 않고 싶어 한다. 하... 인간아... 이 모순덩어리야....
대부분의 관계에는 보통 마르크스주의적인 순간이 있다. 사랑이 보답을 받는 것이 분명해지는 순간이다. 그 순간을 어떻게 헤치고 나아가느냐 하는 것은 자기 사랑과 자기혐오 사이의 균형에 달려 있다... 사랑이 보답받게 된 것은 사랑하는 사람의 수준이 낮다는 증거가 아니라, 자신이 사랑받을 만한 존재가 되었다는 증거임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72p
마르크스주의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알랭 드 보통은 그 방법으로 자존감의 회복을 들고나왔다. 이 또한 좋은 방법의 하나다. 하지만 특정한 조건에서만 통한다. 알랭 드 보통은 마르크스주의가 고개를 내미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가 정말로 그렇게 멋진 사람이라면, 어떻게 나 같은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까?" 이럴 때는 자존감 회복이 가장 적절한 해답이다.
문제는 이러한 생각(그렇게 멋진 사람이 어떻게 나 같은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까?)이 지나치게 유아적이라는 점이다. 이제 막 연애를 해보기 시작한 10~20대라면 요딴 생각에 빠져도 이해가 가지만, 깨지고 차이며 닳고 닳은 어른이 떠올릴 법한 발상은 아니다. 앞서 말했듯이, 우리가 마르크스주의에 빠지는 근본 원인은 잡은 물고기에 흥미를 잃어버리는 데 있다. 애석하지만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본성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마르크스주의를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 인간 본성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
1) 가는 사람 막지 마라
가장 간단하면서 확실한 방법이다. 물고기 떠난다고 슬퍼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있을 때 잘하든가, 잘 보내주든가!
2) 사랑은 구라다
다음은 만화 <타짜>에 나오는 고니의 대사다. "따지고 보면 사랑도 구라야. 사랑은 이랬다저랬다 하면서 상대방을 들었다 놓았다 속이고 자기 자신까지 속이거든... 난 무식한 놈이라 잘 모르지만, 사랑보다는 의리가 있어야 한다고 믿소. 의리란 놈은 이랬다저랬다 하지 않으니까!" 고니는 사랑이 변한다는 것, 불안정하다는 것, 이랬다저랬다 한다는 걸 인정한다. 그래서 사랑이 아니라 의리를 말한다. 사실 오랜 연인이나 부부를 보면 이렇게 사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3) You make me want to be a better man
사랑 연구가로 알려진 심리학자 존 가트맨은 사랑에 관한 2가지 진실을 발견한다. 하나는 사랑을 끝장내는 방법. 경멸이라는 감정이 생길 때 사랑은 무너진다. 그 어떠한 감정보다도 강력해서 대화 사이에 경멸이 오가는 커플은 수개월 안에 반드시 깨진다고 한다. 반대로 사랑을 오래도록 유지하는 방법. 서로의 장점을 발견하고 이를 키워주기 위해 노력하는 커플은 사랑하는 감정이 오래간다고 한다.
나는 이 방법을 내 사랑에 적용해보기로 했고, 실제로 효과를 보고 있다. 나는 글쓰기에 소질이 있고, 내 여친은 그림에 소질이 있다. 우리는 서로의 장점을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여친은 내 글을 가장 열독하는 독자다. 내가 글을 보내주면 오타까지 잡아낼 정도로 꼼꼼하게 읽는다. 내가 바빠 글을 보내지 못하면, 조용히 내 블로그에 들어가 글을 읽고 감상을 전해준다. 나도 여친이 그림을 잘 그릴 수 있도록 돕는다. 그림 공부에 필요한 교재나 장비를 사주기도 하고, 그림 그리기가 뜸하면 언제 그릴 거냐고 닦달하기도 한다.
이렇게 서로의 장점을 키워주기 위해 노력하면 상대에게 많은 관심을 쏟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관심을 갖다 보면 애정이 깊어진다. 게다가 상대가 아닌 자기 내면에서도 변화가 일어난다. 상대방을 위해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게 되더라. 그 모습을 보고 상대가 기뻐하면 그보다 좋은 일이 또 없었다.
영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에는 이런 사랑 고백이 나온다. "당신은 나를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게 해(You make me want to be a better man)" 이 감정이야말로 잡은 물고기에게 관심을 잃지 않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아닐까 싶다. 물고기를 놓치고 싶지 않다면 잘 돌봐야 한다. 먹이도 주고, 물도 갈아주고, 수초도 꾸며주고. 그래서 물고기가 무럭무럭 자라는 걸 보면 애정이 뿜뿜할 수밖에 없다. 물론 굉장한 노력이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힘들기보다 행복한 일이기도 하다. 그러니 '더 나은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보자. 상대도 나도 모두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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