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어 담론을 접하다 보면 그런 생각이 듭니다. 어떤 대상에게 성적 매력을 느끼는 게 어떤 종류의 케이크를 좋아하는 것과 다를 게 있을까요? 제 여자친구는 당근 케이크와 고구마 케이크를 좋아합니다. 저는 초콜릿 스펀지나 티라미수를 좋아하죠. 생크림 케이크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배스킨라빈스는 아이스크림을 케이크라고 우기고 있고, 종종 푸딩인지 케이크인지 분간이 안 가는 것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아예 케이크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죠.
성적 지향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누구는 여자가 좋고, 누구는 남자가 좋고, 누구는 2D가 좋을 수도 있죠. 생물학적으로 남성이지만 언젠가 성전환 수술을 하고 싶은 트렌스젠더가 여자를 좋아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사람은 동성애자일까요? 이성애자일까요?
그러나 이성애자가 아닐 경우 세상은 그를 핍박합니다. 그런데 케이크 중에서 아이스크림 케이크가 최고라 한들 뭐라 하는 사람은 없지요. 이 모든 문제는 어디서 오는 걸까요? 저는 성적 지향의 주체를 규정하려는 시도에서 온다고 생각합니다. 케이크의 경우 어떤 케이크를 좋아하는지만 따집니다. 누가 좋아하는지를 따지지 않습니다. 저는 남성이라 당근 케이크를 좋아하면 안 된다는 소리를 하는 사람은 없지요.
성적 지향도 마찬가지로 생각해야 합니다. 어떤 대상을 좋아하는지만 따지면 됩니다. 그 주체가 누구인지 따질 필요는 없어요. "난 여자가 좋더라."라는 말을 들으면 "아. 저 사람은 여자를 좋아하는구나."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저 사람은 여자인데 여자를 좋아하니깐 레즈비언이구나."라고 규정해서 무엇하겠습니까. 앞서 언급한 복잡한 경우도 마찬가지죠. 생물학적으로 남성이지만 성전환 수술을 하고 싶은 트렌스젠더인데 여자를 좋아하는 사람은 뭐라고 규정해야 할까요? 그냥 "여자를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규정하면 족합니다.
하지만 세상이 이를 허락지 않습니다. 보편적인 이성애자가 아니면 죽일 놈이라고 달려드는 사람들이 아직 존재합니다. 그러니 성 소수자는 스스로를 규정하고 결집할 수밖에 없습니다. 살아남아야 하니까요. 좀 부드럽게 "동성애는 치료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경우도 있죠.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브로콜리 케이크를 좋아한다고 치료가 필요할 리가 없으니까요. 브로콜리 케이크를 좋아하는 소수파라는 이유로 핍박하고, 배척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성 소수자라고 하여 사회적으로 배척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다만, 어쩔 수 없는 거부감은 이해해줘야 합니다. 장어 눈알 케이크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아마 주변 사람 중에는 그의 취향을 보며 눈살을 찌푸리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장어 눈알 케이크를 강요하지 않는 한 뭐라 하는 사람은 없죠. 마찬가지로 장어 눈알 케이크를 좋아하는 사람도 주변의 불쾌감을 어느 정도는 감수하거나 이해해줘야 합니다. 뭐 근데 이런 논의가 무색한 것이 현실이죠. 장어 눈알 케이크 좀 먹는다고 죽일 듯이 달려드는 사람이 존재하는 게 현실인지라... 어쨌든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어쩔 수 없는 거부감은 존재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건 그저 '거부감'에 그쳐야 합니다. 여기서 '강요'나 '배척'이 생겨나면 안 됩니다. 어느 방향으로든지 말이죠.
애당초 성적지향을 나눈다고 하면서 그 주체를 구분할 필요가 있나 싶습니다. 성적"지향"이라면 지향하는 대상만 구분해도 족합니다. 그래서 성 소수자를 L/G/B/T/A/I/Q로 구분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아니 나아가 이성애자도 구분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동성애자를 차별하는 사람들은 동시에 이성애자인 자기 자신을 차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지금 당장은 어렵겠지만, 언젠가는 구분이 필요없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인간에게는 케이크를 선택할 자유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성적 대상을 선택할 자유도 있습니다. 케이크의 자유를! 성적지향의 자유를!
모두의 사랑이 케이크처럼 달콤하길 바라며 글을 마치겠습니다.
※ 이 글은 무성애자에 관한 글(http://pgr21.com/?b=8&n=70463)에서 영감을 얻었습니다.
※ 성적지향의 자유에서 소아성애증과 네크로필리아는 제외입니다. 이 둘은 성적 대상이 거부할 능력이 없거나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성적지향 그 자체로 강요인 셈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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