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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쌤 윤PD

<조이> - 치명적 노잼의 원인은?

※ 이 글은 영화 <조이>, <아메리칸 허슬>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조이는 편할 곳이 없었다. 그녀는 두 아이뿐만 아니라 이혼한 부모님과 할머니 심지어 전남편까지도 돌봐야 했다. 가정과 사회 어느 곳에서도 편할 곳 없이 절망하던 그녀는 어느 날 놀라운 아이디어를 내놓는다. 이제껏 보지 못했던 새로운 대.걸.레. 신제품 아이디어에 사로잡힌 조이는 투자를 받아 상품을 제작했으나 판매망을 뚫지 못해 고비를 맞는다. 그러던 중 기적적으로 홈쇼핑 방송의 기회를 얻게 되었지만, 단 한 개도 팔지 못하고 파산 위기에 몰리게 된다. 결국, 그녀는 이 위기를 정면 돌파하기 위해 자신이 직접 홈쇼핑 쇼 호스트로 나서게 된다.





  현실은 의외로 막장인 법이다

  <조이>는 산만하다. 주인공 조이의 비참한 현실을 보여주다가 난데없이 TV 드라마 속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꿈나라를 헤매기도 한다. 그렇게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들던 조이는 갑자기 아이디어를 쏟아내며 신제품의 도안을 그리기 시작한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고 하던데, 조이의 발명은 벼락같이 떨어진 애미 없는 발명이었다. 이후에도 조이의 성공담은 필연이 아닌 우연에 의존한다. 투자자는 이혼한 아버지의 새 여친이었고, 홈쇼핑 광고는 전남편의 인맥에 의해 이뤄진다. 이런 이야기를 성공담이라고 할 수 있을까? 영화를 보고 나서도 관객은 조이가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는지 알 도리가 없다. 개연성은 부재하고, 극의 흐름은 튀거나 끊어진다. 전통적인 관점이라면 내러티브가 엉망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감독의 실수였을까? 하지만 다른 관점이라면 <조이>의 산만함은 감독의 실수가 아니라 의도된 연출로 보이게 된다. 

  내러티브 양식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보편적인 방식은 할리우드 내러티브이다. 명확하고 분명한 이야기 전달을 위해 원인과 결과의 연결을 중시하고, 확고한 목표를 갖는 능동적 인물을 만들며, 스토리1)는 직선적 구조를 갖고 닫힌 결말을 향한다. (물론 플롯은 직선적이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복잡한 플롯을 가진 작품이라도 스토리는 직선적으로 정리된다) 이에 맞서는 대안적 내러티브도 존재한다. 직선적이고 연속적인 스토리 대신 불확실하고 모호한 스토리를 갖는다. 사건의 전개보다 인물의 내면적, 심리적 갈등과 고민의 탐구에 집중한다. 그리고 열린 결말을 지향한다. 영화는 어느 지점에서 끝난다(ended)고 하기보다 멈춰 선다(stopped).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플롯을 극적으로 구성하기보다 현실의 불투명한 시공간을 있는 그대로 전시한다.2) 현대 영화는 어느 한 가지 양식에 얽매이지 않고 두 양식을 넘나들며 작품을 만든다. 결과적으로 할리우드 내러티브를 따르더라도 그 과정에서 대안적 내러티브의 면모를 보이기도 한다.(타란티노가 잘한다) 반대로 할리우드 내러티브를 따르는 듯하지만 허무맹랑한 결말을 보여주며 불연속성의 미학을 보여주는 작품도 있다. (<지구를 지켜라>의 마지막 장면이 대표적이다)

  <조이>는 대안적 내러티브를 갖춘 작품이다. 개연성은 뒷전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점이 더 현실적이다. 픽션의 문제점은 그게 너무 말이 된다는 점이다. 반면 현실은 결코 앞뒤가 맞지 않는다. 실화는 의외로 막장인 법이다. 흔한 성공담은 입지전적 인물의 자기계발서에 불과하다. 하지만 <조이>는 관객이 기대하는 성공의 비법은 감추고 현실의 아이러니를 내세운다. 어쩌면 이야말로 성공 '신화'에 더 어울릴지도 모른다.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는데, 기적같이 그려내는 게 옳지 않은가.

  더불어 사건의 전개에도 무관심하다. 스토리상 가장 통쾌한 장면은 저작권 사기를 간파하는 장면이다. 하지만 영화는 이 장면을 극적으로 다루지 않는다. 심지어 저작권 사기를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알기 쉽고 자세하게 묘사하지도 않는다. 감독 데이비드 O 러셀의 이러한 성향은 <아메리칸 허슬>에서도 나타난다. <아메리칸 허슬>은 사기꾼의 이야기를 다룬 케이퍼 무비이지만, 정작 중요한 사기 트릭에 관해서는 전혀 설명해주지 않는다. 트릭이 밝혀지는 순간은 케이퍼 무비에서 가장 통쾌한 순간이다. 그런데 데이비드 O 러셀은 이 부분을 의도적으로 다루지 않았다. 도대체 이유가 뭘까? 사건의 전개를 포기하는 대신 무엇을 얻으려 한 것일까? 그것은 바로 인물이다. <아메리칸 허슬>에서도 <조이>에서도 데이비드 O 러셀이 집중하는 것은 오로지 인물이었다. 어떤 인물도 버려지지 않는다. 단순하고 평면적인 인물도 없다. 생동감 넘치는 인물의 다양한 개성이 부딪히며 벌어지는 코미디와 애잔함이 바로 감독이 집중한 부분이다.

  심지어 사건이 전개되는 원동력도 개연성이 아니라 인물의 성격에서 끌고 온다. 조이는 어떻게 성공하게 되었을까? 이에 대해 감독은 '조이는 원래 그런 사람이다.'라고 말하는 셈이다. 이 또한 아이러니하게 현실적이다. "걔 왜 그랬데?"라는 질문에 "걔 원래 성격이 그래."라는 답변을 우리는 현실에서 너무나 자주 듣는다. 그러나 전통적 내러티브에서 이런 표현은 허락되지 않았다. 하지만 <조이>는 불문율을 깨고 과감한 시도를 선보였다. 영화 속 우연한 사건들은 인물의 성격을 바탕으로 보면 필연적 사건으로 느껴진다. 바람기 넘치는 아버지가 돈 많은 과부를 투자자로 데려오는 것이나, 가수 지망생 한량 남편이 방송계 커넥션을 끌어오는 점이 그렇다. 사건은 우연적이지만, 그 인물이라면 그럴만하게 보인다. 사건의 전개조차도 인물의 심리와 내면에 의존하는 점 또한 대안적 내러티브다운 면모다.





  자기만족에 머무르다

  이처럼 대안적 내러티브를 선택해서 무엇을 얻고자 했을까? 현실의 아이러니? 개성의 충돌이 빚어내는 웃픈 코미디? 하지만 의도가 아무리 원대한들 재미가 없으면 무용지물이다. <조이>는 과감한 시도를 보여준 작품이지만 치명적으로 재미가 없고 지루하다. <아메리칸 허슬>도 마찬가지였다. 인물은 생동감이 넘치고 제니퍼 로렌스는 최고의 연기를 선보였지만, 재미가 없었다. 통쾌함을 버린 케이퍼 무비였다. 사기의 트릭은 보여주지도 않고 전자레인지에 알루미늄 그릇을 태워 먹는 장면에 집중했으니 재밌을 리가 만무하다. 혹시 장르가 시트콤이었다면 재미를 느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메리칸 허슬>의 스토리는 명백히 케이퍼 무비다. 어떤 내러티브를 가졌더라도 관객의 뇌리에 남는 이야기 즉, 스토리는 케이퍼 무비의 전형이었다. 형식과 내용이 어긋나니 코미디도 힘을 잃었다. <조이>도 마찬가지다. 여성 CEO의 이야기라면 으레 성공 미담을 기대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조이>에는 미담도 없고, 노력도 없다. 성공은 봄바람 타고 날아온 나비처럼 찾아온다. 설령 그게 현실일지라도 관객은 그런 표현이 안이하게 느껴질 뿐이다. 

  데이비드 O 러셀은 <조이>를 만들며 인물들의 충돌과 현실의 아이러니를 그리며 몹시 즐거웠을 것 같다. 하지만 관객도 그 재미를 느낄 거라 단정했다면 너무 안일했다. 작가로서 자신이 즐기는 것과 관객이 즐거워하는 것은 다르다. 때로는 그 차이가 매우 클 수도 있다. 자기만족에 머물기에는 그에게 주어지는 자본과 배우의 면모가 너무 크다. 자신의 스타일을 꾸준히 고수하겠다면 최소한 스타일에 어울리는 스토리를 갖다 썼으면 좋겠다.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은 확실히 좋았으니깐.





  1) 스토리와 플롯의 차이

  스토리는 시간을 따라 서술하는 것이고, 플롯은 인과에 따라 서술하는 것입니다. 스토리는 내러티브가 묘사하는 대상인 반면, 플롯은 그 대상이 묘사되는 방식입니다. 따라서 대부분의 픽션은 플롯으로 쓰입니다. 그리고 관객은 이를 받아들여 자신의 머릿속에서 스토리를 정리합니다. 작품을 보는 동안은 '왜?', '어떻게?'라는 물음이 떠오르지만, 다 보고 나서는 그러한 물음이 해소됩니다. 인과 관계가 정리되어 이야기를 플롯이 아닌 스토리로 이해하기 때문이죠. 작품을 다 보고 나서도 여전히 물음이 남는다면 시간순으로 배열한 스토리에 구멍이 있는 셈입니다. 이것이 극의 이해를 방해한다면 망작이 되는 것이고, 차기작을 기대하게 만들면 떡밥이 되는 것이며, 별로 신경쓰이지 않는다면 축약의 묘를 발휘한 것이 되겠죠.

  2) 참조 : 영화 기술 역사 (정헌,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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