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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쌤 윤PD

<버드맨> - 추락하는 것은 아름답지 않다.

※ 이 글은 영화 <버드맨 : 또는 예기치 않은 무지의 미덕>(이하 '버드맨')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아카데미에서 작품상과 감독상을 동시에 거머쥐며 총 4관왕에 올라 올해 아카데미의 최종승자로 등극한 <버드맨>을 금요일에 어렵게 만나고 왔다.(신촌 메가박스에서 11:45 한 타임만 열려있었다 -_-) 그동안 삶과 인간에 대한 깊은 성찰을 보여줬던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의 신작이기에 개봉 한참 전부터 많은 기대를 가졌던 작품이었다. 화려한 수상경력을 통해 기대감이 한껏 부풀었던 <버드맨>은 나에게 어떤 작품으로 남을 것인지 이글을 통해 다시 되새겨보고자 한다. 





  리건 톰슨은 왜 죽음을 선택했을까?

  영화의 마지막 장면. 자살에 실패한 리건 톰슨(마이클 키튼)은 다시 자살하려는 듯 창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다. 샘 톰슨(엠마 스톤)은 병실로 돌아와 아빠(리건)를 찾지만,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열려있는 창문을 보며 불안한 마음에 창밖 아래를 바라본다. 아래를 보며 복잡한 표정을 짓던 샘은 이내 위를 바라보더니 미묘한 미소를 짓는다. 과연 리건은 죽은 것일까? 아니면 그의 첫 등장처럼 공중에 떠올라 있던 것일까? 

  나는 이에 대해 리건이 죽었다고 확신한다. 영화 내내 이어졌던 리건의 초능력이 그의 망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장면들이 계속되기도 했지만, 그의 죽음을 확신하는 진짜 이유는 그것이 인간 심리에 있어 더 타당하기 때문이다.

  한 때 '버드맨'이라는 블록버스터 히어로물로 화려한 과거를 누렸지만, 이제는 그저 한물간 퇴물 배우가 된 리건은 연극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을 통해 재기하려 했다. 하지만 그의 바람은 무난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가장 골치 아픈 존재는 역시 마이크 샤이너(에드워드 노튼)다. 마이크의 등장은 의외로 긍정적이었다. 형편없는 연기를 보여준 전임자에 비해 인상적인 연기와 작품 해석력을 보여주며 리건에게 성공의 희망을 품게 해주었다. 하지만 프리뷰 무대에서 술을 마시고, 자금 압박에 시달리는 와중에 태닝머신을 주문하며 돌아이의 면모를 드러낸다. 심지어 언론 인터뷰를 통해 리건이 이 연극을 기획하게 된 이유인 레이먼드 카버에 대한 일화마저 자신의 이야기인 양 가로채었으며, 자신의 딸에게 접근하는 모습을 보여주기까지 한다.(내가 자식은 없지만, 딸 건드리는 사내놈만큼 미운 것이 없을 것 같다.) 마이크는 예술가로서 인정받고자 하는 리건의 욕망을 가로채며 리건에게 심한 정신적 압박을 가한 것이다. 

  마이크뿐만 아니라 그를 둘러싼 모든 존재들이 그를 압박한다. 딸인 샘은 리건의 연극을 그저 주목받고자 하는 퇴물의 발버둥으로 취급한다. 게다가 가뜩이나 맘에 들지 않는 마이크와 시시덕거리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이것이 발단이 되어 리건은 '브로드웨이 알몸 질주'라는 역대급 소스를 제공하기까지 한다. 그간 무관심만을 보내준 대중이 이 추태가 벌어지고 나서야 뜨거운 관심을 쏟아내는 점 또한 씁쓸한 부분이다. 평론가 타비타(린제이 던컨)는 그의 예술혼에는 일말의 관심조차 주지 않은 채, 연예인이 예술가인척 한다며 노골적인 증오를 드러낸다. 현학적 뜬구름 잡기 아니면 돼지정액 수준의 가십만 밝히는 언론 또한 마찬가지다. 그 어느 곳에서도 진솔한 예술에 대한 소통과 위로를 받지 못하는 리건의 심리가 얼마나 큰 스트레스에 시달리는지, 지켜보기가 안쓰러울 정도이다. (또한 돌아이 배우, SNS, 노답 언론, 악의적 평론가에 대한 묘사는 헛웃음을 자아내는 블랙코미디이기도 하다.)

  그런 리건이 무대 위에서의 죽음을 선택하자 여론과 주위의 반응은 급변한다. 악의를 드러냈던 평론가는 리건의 예술혼을 칭송하는 비평을 내놓았고, 그의 추태를 조롱하던 대중은 훌륭한 예술가에 대한 존경과 위로의 마음을 전해온다.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이 리건이 욕망하던 모든 것을 성취하도록 해주는 기회로 거듭난 것이다. 그런데 리건은 왜 다시 죽음을 택하였던 것일까? 욕망하던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는데 말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욕망만으로 이루어진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행동이 욕망에 따라 움직이는 것은 픽션의 캐릭터이지 현실의 인간이 아니다. 리건을 첫 번째 자살로 내몰았던 것은 정서적 고립에 따른 외로움과 인간관계와 자금 사정 그리고 성공에 대한 집착에서 오는 압박에 따른 스트레스였다. 그리고 병원에서 눈을 뜬 리건이 목도한 것은 자신의 죽음을 예술혼으로 미화하는 평론과 이를 돈으로 치환하려는 제이크(자흐 갈리피아나키스)의 모습이었다. 아무도 자신의 고통과 슬픔을 알아주지 않는 현실에 미련이 남아있을 수 있을까?(그나마 그런 제이크에게 분노의 따귀를 날려주는 전 부인(에이미 라이언)이 있긴 했다.) 자신이 리건이라고 생각해보자. 예술의 경지를 뛰어넘고자 하는 거룩한 심미적 의도를 위해 죽음을 선택할 수 있을까? 나는 절대 그런 선택을 하지 않을 것 같다. 비록 분열증상의 정신병을 가졌지만, 욕망을 향한 광기를 보여준 적은 없었다. 리건은 발가벗겨진 채 브로드웨이에 던져진 나약한 인간일 뿐이었다. 

  이런 면에서 리건이란 캐릭터는 상당히 현실적이라 할 수 있다. 단지 마이클 키튼의 자전적 캐릭터라는 이유만으로 현실적이기 보다는, 이냐리투 감독의 인간에 대한 깊은 성찰도 리건이란 캐릭터에게 현실감을 부과한 것이다. 기존의 작품과는 사뭇 다른 느낌의 작품이었지만, <버드맨>에서도 인간에 대한 이냐리투의 깊은 이해는 여전히 빛을 발하고 있었다.

▲ 가끔 꾸게 되는 발가벗겨진 채 거리로 쫓겨나는 꿈을 보는 것 같았다.






  예기치 않은 무지의 끔찍함

  영화 속에는 리건을 괴롭히는 갖가지 인물들이 나온다. 그 중에서 가장 잔인한 최악의 인물을 꼽자면 평론가 타비타(린제이 던컨)를 꼽겠다. 리건이 무대 위에서 자살을 하자 타비타는 '예기치 않은 무지의 미덕'이라는 평론을 낸다. 여기에서 리건이 무대 위에 흘린 피가 브로드웨이에 생명을 불어넣었다는 극찬을 한다. 비록 픽션이기는 하나 내가 지금까지 들어본 평론 중에 최악의 평론이었다. 물론 생명의 소중함에 대한 나의 개인적인 신념에 따른 평가이기도 하지만, 이를 차치하더라도 이 평론이 최악이라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타비타는 리건에 대해 "너는 예술가가 아니라 영화라는 포르노그래피나 찍어 내는 딴따라일 뿐이다."라며 비난한다. 그랬던 사람이 무대위의 자살이라는 스너프에 격찬을 보내고 있으니, 어이가 없어 기가 찰 뿐이다. 이쯤 되면 죽음을 찬양하는 위선을 넘어 차라리 죽어버리길 바라는 끔찍한 악의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의 자살이 예술적 가치를 높이는 것으로 해석될 여지는 전혀 없다. 우선 리건이 머리를 쏘고 난 뒤 관객에서 쏟아진 뜨거운 갈채는 리건이 자살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기에 나온 것이다. 리건이 진짜로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안 뒤에도 그 앞에서 뜨거운 박수를 보낸다면 그건 미친놈에 불과할 뿐이다. 타바타의 평론 또한 커튼 뒤의 작품 외적인 사실을 확인하고 나서야 쓸 수 있던 것이다. 이를 파악하지 못한 채 병실에서 장밋빛 미래를 꿈꾸는 제이크의 모습은 정말 어리석기 그지없다. 이 작품이 다른 곳에서도 또 다시 전설이 되려면 그때마다 주연 배우를 총살시켜야 할 테니 말이다.

  <버드맨>은 비평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다양한 곳에서 예술을 바라보는 편견들을 꼬집고 있다. 우선 앞서 언급한 언론 노답 3형제가 있다. 한 명은 무슨 뜻인지도 모를 고상한 이야기들만 늘어놓으며 뜬구름을 잡는다. 연출가에게 작품을 다루는 진솔한 의도를 묻고자 하는 의도는 전혀 없다. 그저 자신의 지적 우월함을 자랑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래도 이쪽은 고상하기라도 하지, 돼지 정액을 먹느냐는 쓰레기 가십거리를 물어보는 기자나 이슈만 밝히는 기자들을 보자니 머리가 절로 절레절레 흔들어졌다.(나중에 돌이켜 생각하니 '두 유 노우 김치?'가 떠올라 괜히 얼굴이 화끈거리기도 했다.)

  눈길을 사로잡는 블록버스터에만 관심을 쏟는 대중들에 대한 비판도 인상적이었다. 단순히 그런 세태를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관객의 눈이 뜨이는 과감한 장면을 삽입하여, 꼬집고자 하는 부분을 스크린과 관객사이에 현실화시켜 버린다. 나 조차도 그 장면에서 집중도가 급상승했으니 감독의 의도에 정확히 낚여버린 셈이다.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술집에서 타비타와 리건이 나눈 대화라고 생각한다. 타비타는 영화를 예술로서 인정하지 않는다. 어쩌면 <버드맨>이라는 영화 자체가 이러한 시각에 대한 도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마치 연극을 보는 것 같은 암전의 도입부부터, 편집을 극도로 배제하는 롱테이크도 이런 목적에서 나왔다는 생각이 든다. 

  예술의 열정에 대한 주변의 무시와 무지는 리건을 고립시키고 죽음으로 내몰았다. 다시 리건의 자살로 돌아와 보자. 리건이 쓰러졌을 때 카메라의 시선은 관객을 향한다. 그의 죽음을 알 도리가 없는 관객의 무지는 과연 미덕이었을까? 죽음 앞에 박수를 보낸 사람들에게 그 장면이 예술의 신경지가 될지, 악몽과 죄책감의 발로가 될지 생각해보자. <버드맨>은 그것을 미덕이라 말하는 것일까, 아니면 무지의 끔찍함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일까?

▲ 비극을 환희로 착각하는 것은 환상일 뿐이다.






  아카데미가 선택한 이유, 대중에게 멀어질 것 같은 이유

  <버드맨>은 아카데미 4관왕에 작품상과 감독상을 모두 거머쥐는 쾌거를 올렸다. 영화를 보기 전까지는 아카데미의 이러한(특히 이를 통해 <보이후드>가 버림받게 되는) 선택에 대해 다소 의문이 있었다. 그러나 영화를 보고 나니 이러한 선택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새로운 경지를 보여준 원 테이크 연출과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 그리고 그 속에 담긴 예술과 인간에 대한 깊은 성찰은 매우 훌륭했다. 여기에 한 가지 이유를 덧붙이자면, 영화의 이야기가 그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더 사랑받았다는 생각이다. 예술가가 겪게 되는 스트레스들에 그들이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여기에 배우, 언론, 비평까지 한데 모여 현실감 있게 그려내니 영화와 관련된 사람들에게는 정말 흥미롭게 다가왔을 것 같다.

  하지만 이러한 장점은 대중에겐 오히려 단점으로 작용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나로서도 인정받고자 몸부림치는 리건의 욕망과 그로 인한 스트레스에는 공감하였지만, 돌아이 배우나, 노답 언론, 악의적 평론가에게는 감정이 크게 요동치지는 않았다. 그런 면에서 <보이후드>가 나에게는 훨씬 더 큰 울림을 주었다. 그들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무엇이 더 훌륭한지 우열을 가리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주변에 널리 추천하기에는 조금 꺼려지는 것이 사실이다. 마치 여자에게 군대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 영화가 되지 않을까 싶다. 





※ 이 영화가 느닷없는 김치 논란으로 얼룩지는 것은 대단히 아쉽습니다. 영화 곳곳에 인종 차별적 요소들이 들어있지만 이것들은 등장인물의 성격이 형편없음을 드러내는 요소로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엠마 스톤이 역대급으로 이뻤고, 에드워드 노튼은 정말 밉상이었습니다.(내가 남자라 그런가...)

※ 사진 구글링 하다가 리건이 죽었는지 살았는지에 대한 흥미로운 분석글을 발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