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영화 <킹스맨 : 시크릿 에이전트>(이하 '킹스맨')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킥애스 : 영웅의 탄생>(이하 '킥애스')을 통해 성공적으로 자신의 스타일을 구축한 매튜 본 감독. <엑스맨 : 퍼스트 클래스>로 연타석 홈런을 날리며 주류 감독으로서 확실한 입지를 다졌다. 그런 그가 <엑스맨 시리즈>를 뒤로하고 선택한 신작 <킹스맨>이었기에 개봉 전부터 많은 기대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직접 만난 <킹스맨>은 <킥애스>를 뛰어넘는 똘끼와 액션을 보여주며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약을 진하게 빨았다는 평가를 받는 <킹스맨>. 도대체 감독은 무슨 생각으로 이런 미친 영화를 만든 것일까?
첩보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좔좔 흐르는 개간지
<본 아이덴티티>의 혁신을 기억하는가? 첩보 액션에 리얼리티를 가미하여 기존에 볼 수 없었던 새로움으로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제이슨 본'이란 이름을 통해 기존 첩보 액션의 고전인 <007 시리즈>의 '제임스 본드'를 비꼬기도 하였다. 그렇게 <본 시리즈>는 첩보 액션의 새로운 표준이 되었다. 하지만 <007 시리즈>도 이에 굴복하지 않고 다니엘 크레이그라는 마초적 배우를 앞세워 <007 카지노 로얄>, <007 퀀텀 오브 솔러스>, <007 스카이폴> 3부작을 통해 새로운 트렌드에 뒤지지 않는 모습을 보여줬다. 특히 <007 스카이폴>은 자기반성을 통해 신구의 조화를 보여주며 대중과 평단 양쪽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이 두 영화로부터 알 수 있는 확실한 사실은 첩보 액션의 최신 트렌드는 바로 '리얼리티'에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킹스맨>은 이러한 기존 트렌드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리얼리티 따위는 깔끔하게 무시하는 것이다. 우선 킹스맨이라는 기관을 살펴보자. 킹스맨은 초국가적 국제 정보기관이다. 세상에 이런 게 어디 있나? 본래 스파이는 국가를 위해 움직인다. 국가를 위해서 비윤리적 행위도 서슴지 않는 애국주의의 꼭대기에 있는 기관이다. (이 부분은 <본 시리즈>의 핵심 갈등요소이기도 하다.) 그런데 오직 정의만 생각하는 초 국가적 기관이라니 그야말로 판타지다. 그런데도 한 통의 통화로 수감된 주인공을 꺼내며 영국 경찰을 좌지우지하는 권력을 보여준다. 도대체 영국 경찰이 자국 기관도 아닌 곳의 명령을 뭐하러 듣는단 말인가? 판타지 정도가 아니라 리얼리티 따위는 개나 줘버리는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킹스맨>은 무엇을 보여주려 한 것일까? 그것은 바로 '멋'이다. 라인이 살아있는 깔끔한 수트, 고급스러운 우산, 신사의 풍미가 느껴지는 영국 악센트. 특히 '브로그 없는 옥스포드'를 강조하며 신사의 품격이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준다. 이러한 요소들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다니엘 크레이그 3부작 이전의 <007 시리즈>에서 강조하던 제임스 본드의 멋이 바로 이러한 것들이었다. <007 시리즈>가 리얼리티를 강조하며 살짝 소외했던 첩보원의 품격을 다시 노골적으로 불러온 것이다.(물론 다니엘 크레이그 3부작이 이런 부분을 완전히 무시한 것은 아니다. <킹스맨>은 '베스퍼 마티니'등 주요 소재를 오마쥬하며 이점을 언급한다.) 신사의 멋을 강조하기 위해 빌런에게 힙합 패션과 새는 발음을 부과한 점도 꽤 인상적이었다. (사무엘 잭슨이 그렇게 찌질해 보일 수가 없었다.) 이 점은 <킹스맨>의 멋이 철저한 계산에 의한 것이라는 느낌을 준다.
<킹스맨>이 이렇게 신사의 멋을 다시 전면에 내세울 수 있었던 것은 진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피어스 브로스넌의 <007 시리즈>를 굉장히 싫어한다. 허무맹랑한 공상과학 무기와 진지함이 뒤섞였을 때 그 맛은 오로지 유치함이었다. 하지만 <킹스맨>은 진지함을 버리고 유쾌함을 취했다. 그 덕에 리얼리티라는 개연성이 없어도 거부감이 들지 않는다. 만화처럼 유쾌한 분위기는 만화 같은 무기들이 등장해도 어색하지 않게 만들어준다. 멋의 낭만을 위해 무엇을 쳐내야 할지 분명하게 알고 있는 것이다.
▲ 멋이 좔좔 흐른다는 건 바로 이런 게 아닐까.
겁 없는 액션
이전에 유게에서 액션에 대해 많은 배움을 얻었던 동영상이 있다.
이 동영상은 왜 최근의 액션들이 맥없이 느껴지는지 그 이유를 보여준다. 영화들이 맥없는 액션을 보여주는 이유는 뭘까? 가장 큰 이유는 역시 돈이다. 노골적이고 잔인한 타격장면으로 19세 판정을 받게 되면 흥행에 큰 타격을 받기 때문이다. 게다가 합(合)이 살아있는 액션을 위해 재촬영이 늘어나면 그 또한 돈의 압박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여기에 배우들이 고통을 회피하며 몸을 사리게 되면 액션은 더 형편없어진다.
그렇다면 <킹스맨>의 액션은 어떨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확실히 살아있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잔인한 표현에 대해 겁이 없다는 점이다. 사람이 두 쪽으로 갈라지고, 손목이 날아간다. 망설임 없이 사람들의 이마에 총알을 박아넣는다. 19세 판정 따위는 겁내지 않는 모습이다. 특히 백미는 클라이막스의 폭죽신. 재밌는 점은 중반쯤에는 이 폭발 표현을 노골적으로 보여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등장인물들이 끔찍해 하는 모습만 보여준다. 마치 너무 잔인하기에 우회적으로 표현하는 척한다. 하지만 최후에 그것을 뻥뻥 터뜨리고 만다. 기존 영화들이 노골적 표현을 머뭇거리는 것을 비꼬듯이 통쾌하게 터뜨려버린다. 특히 통쾌하다는 점, 이 부분이 정말 매력적이다. 대게의 영화들이 잔인함을 통해 비장미를 강조하는 것과는 정반대이다. <이치 더 킬러>등에서 등장한, 일본 컬트 호러 영화들에서 느껴지는 잔인하고 유쾌한 감각을 헐리우드 주류 영화로 끌어온 것이다. 이러한 표현은 이제 매튜 본 감독의 독자적 스타일로 자리 잡았다는 느낌이 든다.
타격의 순간을 회피하지 않는다는 점 또한 칭찬하고 싶은 부분이다. 위 동영상에서 지적하듯이, 여타 영화들은 편집을 통해 타격의 순간을 회피한다. 하지만 <킹스맨>은 다르다. 초반 펍 싸움을 보면, 테이크를 나누면서도 컵에 맞는 순간과 그로 인해 뒤로 넘어져 바닥에 부딪히는 순간을 보여준다. 편집을 통해 오히려 타격의 순간에 집중하는 것이다. 또한, 적절한 CG와 롱테이크의 사용도 타격감을 배가시키는데 톡톡한 역할을 한다. 그러면서도 절단하는 장면에 대해서는 오히려 절단의 순간을 보여주지 않는다. 대신 절단 후의 잔인한 표현을 노골적으로 한다. 이는 절단이 타격에 비하면 그 느낌을 시청각으로 전달하기 힘들다는 점을 고려한 연출이라고 볼 수 있다. 대신 잔인함이라는 스타일로 치환하였기에 부족하다는 느낌은 주지 않는다.
이처럼 <킹스맨>의 액션 촬영은 잔인함과 고통을 겁 없이 드러낸다. 그 자체로도 가치가 있지만, 이것이 멋을 강조하는 스타일과 호응하여 상승작용을 일으킨다는 점이 정말 매력적이다. 그것이 가장 잘 드러나는 장면이 바로 교회 전투신이다. 젠틀함과 잔인함이 어우러지는 독특한 매력. 이 장면만으로도 이 영화는 관람할 가치가 충분하다.
▲ 이 독특함을 뭐라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섹시하다는 것은 확실하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만든 거지?
<킹스맨>이 트렌드를 역행하면서 멋을 강조한 이유는 무엇일까? 잔인함과 타격감을 살리는 액션에 집중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 해답은 마지막 장면에 등장한 카세트 플레이어 모양의 아이패드 앱(app)에 있다. (마지막에 에그시가 엄마를 찾아 펍에 왔을 때, 그녀는 카세트 플레이어 모양의 앱을 통해 음악을 듣고 있었다.)
그 옛날 사람들이 007에 열광한 이유는 무엇이었던가? 다름 아닌 신사의 멋이었다. <캐치 미 이프 유 캔>에서도 제임스 본드의 패션과 억양을 흉내 내는 주인공의 모습이 나온다. <킹스맨>은 사람들이 이것에 열광했다는 점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액션 촬영에 있어서는 최근의 트렌드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트렌드를 선도하는 느낌이다. 중요한 것은 관객들이 <본 시리즈> 이후에 스파이 무비에서 화려한 액션을 기대한다는 것을 파악하고 있다는 점이다. <킹스맨>은 이렇게 관객들이 기대하는 것을 정확히 포착하고, 보여준다. 세월이 지나고 유행이 변해도 결국 사람들이 열광하는 그것. 그것을 보여주는 것에 모든 것을 쏟아붓는다. (여기에 기존 스타일을 비꼬는 유머는 덤이다.)
카세트 플레이어 앱은 이러한 감독의 의도를 상징한다. 세월이 흘러 이제 카세트는 아무도 듣지 않는다. 하지만 새로운 기기가 있어도 우리가 그것에 원하는 것은 과거의 감성과 다르지 않다. 그리고 그 감성은 카세트 플레이어 모양의 앱으로 드러난다. 매튜 본은 리얼리즘과 자기반성 따위의 진지함은 벗어던지고 우리가 원하는 감성, 열광하는 감성을 노골적으로 추구하며 키치적 가치를 드높인 것이다.
<킹스맨>은 똘기만 있는 영화가 아니다. 그 똘끼에는 관객이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감독의 고뇌가 들어있다. <킹스맨>은 우리가 열광했던 가치를 되돌아본 키치 환원주의이자, 가장 화끈한 똘끼를 보여주는 키치 필름이다.
※ 콜린 퍼스 날 가져요 ㅠ,ㅠ
※ <킥애스>에 이어 <킹스맨>에서도 하늘을 나는 장비가 등장한다. 매튜 본의 시그니쳐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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