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자사자 노력하라는 말이 통하는 시대는 이제 끝났다. 그러다 진짜 죽는다는 걸 부모 세대를 보며 깨달았으니까. 그렇다고 노력이 무용지물인 양 말하는 건 더 싫다. 특히 힐링 타령은 최악이다. "여러분은 잘못 없어요. 잘못된 건 세상입니다." 틀린 말은 아닐지 모르지만, 그렇게 말해봤자 바뀌는 건 없다. 하나 둘 그 사실을 깨달으면서 힐링 유맹도 한물갔다.
힐링이 별로긴 하지만, 그렇다고 위로가 필요 없다는 말은 아니다. 사는 건 언제나 빡빡했고, 그럴 때 마음을 보듬어 주는 위로만큼 고마운 게 없다. 나는 이런 위로를 바란다. 노오오오력도 힐링도 말고, 하루를 마칠 때 '수고했어요.'라고 건네는 한마디. 딱 그 정도를 지키는 담백한 위로가 우리 시대에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책은 나의 아주 사적인 음주 생활과 직장 생활에 관한 기록이다. 10여 년간 직장 생활을 하며 겪은 사사로운 에피소드와 그보다 오랜 나의 음주 생활을 통해 조금씩 알게 된 술에 간한 소소한 이야기들이다.
- 《이 과장의 퇴근주》 9p
그래서 《이 과장의 퇴근주》가 반갑다. 이 책은 세상 탓을 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꼰대처럼 이게 옳다 저게 옳다 하지도 않는다. 자신의 삶을 자신의 글로 담담하게 풀어낼 뿐이다. 그런데 그 점이 위로가 된다. 하루의 시름과 이를 위로하는 술 한 잔을 보며 '다들 그렇게 힘들게 또 재밌게 사는구나.' 그런 생각이 들면서 조금은 마음이 편안해진다.
이렇게 요란 떨지 않는 위로가 좋다. 주인이 아는 체하면서 이것저것 말 시키는 가게보다 조용히 서비스 음료 한 잔만 주는 가게가 더 좋은 것과 비슷한 이치다. 어쩌면 작가는 위로할 생각조차 없었을 지도 모른다. 술 한잔 나누면서 조곤조곤 본인 이야기를 들려준 것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런 얘기들이 위로가 된다. 요란하지 않은 위로가 된다.
회사에서 정한 출근 시간이 8시라면, 8시까지 도착하면 되는 걸까. 아니면 8시부터 일을 시작해야 하는 걸까. 여러 의견이 분분하지만, 나라는 인간은 적당히 주변의 분위기에 맞추는 편... 그렇다고 너무 성실해 보이는 건 싫어. 45분에서 50분 사이에 도착해야지. 그게 나만의 타협점이다.
- 《이 과장의 퇴근주》 17p
이 과장은 젠체하지 않고 직장 생활 노하우를 전한다. 이걸 해야 성공한다고 말하지도 않고, 도덕적 우월함을 내비치지도 않는다. 그저 눈치껏, 적당히, 그러면서도 배려 있게 세상을 살아가는 법을 알려준다.
금요일의 약속을 오후 4시로 잡는 건, 상대방의 눈에 띄지 않는 사려 깊은 배려다. 개인적으로는 세련된 직장인의 행동 양식으로 널리 알리고 싶은 심정이다.
- 《이 과장의 퇴근주》 115p
그리고 이 담담한 직장 생활 이야기의 마무리에 어울리는 한 잔을 권한다.
바에 가면 첫 잔은 대체로 진 피즈를 시켜서 시원하게 원샷 하는 것이 습관이지만 오늘은 조금 특별하게 위스키 사워다. 위스키 사워는 버번위스키에 레몬주스와 설탕 시럽을 넣고 셰이킹 한 칵테일이다... 잠시 기다리니 바텐더가 기다란 롱 드링크 잔에 담긴 위스키 사워를 가지고 왔다. 기본 레시피에 탄산수를 더해서 조금 더 마시기 편하게 만들어준 모양이다. 취한 손님을 위한 배려가 참 고맙다.
- 《이 과장의 퇴근주》 111p
두런두런 직장 생활 이야기를 할 때면 〈심야식당〉이 떠오르기도 하고 술맛을 기가 막히게 묘사할 때면 〈고독한 미식가〉가 떠오르기도 한다. 작가의 일본 생활이 바탕이 되어서 이런 감성이 진하게 느껴지는 것도 같다. 요란 떨지 않고 묵묵하게 위로하는 그런 감성 말이다.
공부해야 한다는 압박 없이 편하게 책을 읽어본 지가 언제인지 가물가물하다. 소파에 누워서 눈 가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 읽어도 편한 책, 《이 과장의 퇴근주》는 그런 책이다. 월급쟁이들이라면 누구나 느꼈을 퇴근의 후련함과 아쉬움을 한 잔의 술에 녹여 풀어낸다. 그 시원섭섭한 감성을 느끼고 싶다면 한 손에는 나이트캡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이 과장의 퇴근주》를 든 채, 해가 진 도시의 고요함을 만끽해 보길 바란다.
※ 이 글은 제 친구 이창협 작가가 낸 신간 《이 과장의 퇴근주》를 위해 쓴 서평입니다. 책은 선물받았지만, 서평 작성을 위한 대가를 받지는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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