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존 메이너드 케인스』에서 본 케인스는 전형적인 천재였다. '천재'라는 매우 특이한 대상에 '전형적'이라는 말을 붙인 게 어딘가 우스워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 우스운 모습을 기꺼이 감수할 정도로 케인스는 확실한 천재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단지 주변 사람들이 찬양하는 영민한 모습과 그가 후대에 남긴 위대한 업적 때문만은 아니다. 뭐랄까... 케인스는 오늘날 영화나 드라마에 비슷한 인물이 등장하면 식상하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천재 같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진보적이지만 극단적이지 않은 정치 성향을 가졌고, 문화 예술적으로 뛰어난 식견을 가지고 있으며, 특히 연애사는 천재들이 으레 그렇듯이 난잡한 모습도 보인다. (약간 관종끼도 있는 것 같다) 책을 보면서 아인슈타인이 많이 떠올랐다. 원래 천재들은 이런 건가 싶을 정도로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그렇게 전형적인 천재 케인스는 세상을 '어떻게' 바꾸었을까? 여기서 '어떻게'에 따옴표까지 써 가며 강조한 이유는 흔하게 쓰이는 용례와 다른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위 문장은 케인스 이전과 이후에 세상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물어보는 것이 아니다. 케인스가 세상을 바꾸기 위해 어떠한 노력을 했는지 물어보는 것이다. 천재라는 말이 전형적으로 어울리는 사람이라면 빈대떡 뒤집듯 쉽게 세상을 바꾸지 않았을까?
하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케인스가 형이상학의 세계에서 돈의 세계로 뛰어든 것은 1914년이었다. 아직 미완성된 부분도 있었지만, 이미 그때 케인스는 금본위제와 수정자본주의에 관한 나름의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통해 영국의 금융 위기를 극복하고자 했고, 1차대전 이후 세계적 경제 혼란을 막고자 했다. 하지만 그의 주장은 통하지 않았다.
케인스의 사상을 반영한 정책은 영국이 아니라 미국에서 나왔다. 1929년에 터진 대공황이라는 초유의 경제적 비상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1933년부터 내놓은 일련의 정책, 즉 뉴딜 정책이었다. 케인스가 돈의 세계로 뛰어든 지 무려 20년이 지난 뒤였다.
금본위제는 어떤가? 대공황 이후에 영국과 미국은 금본위제를 포기했으나 1944년 브레튼우즈 체제가 출범하면서 금본위제는 다시 부활한다. 그렇게 부활한 금본위제는 1971년이 되어서야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이 백기를 들면서 막을 내렸다. 케인스가 런던으로 떠난 지 57년이 지난 뒤였고, 케인스가 죽은 지 25년이 지난 뒤였다.
영화 《그린 북》은 미국 남부로 콘서트 투어를 다니는 흑인 피아니스트와 그의 백인 보디가드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다. 피아니스트 돈 셜리도 천재라는 수식어가 전형적으로 어울리는 인물이었다. 자기 분야에서 최고의 실력을 갖췄을 뿐 아니라 뭔가 4차원적인 성향까지 보여준다. 그에 반해 보디가드인 프랭크 토니는 천재적인 면이 눈곱만큼도 없는, 오히려 그 반대쪽에 더 어울리는 보통 사람이었다.
토니는 처음에 지 잘난 맛에 사는 셜리를 아니꼬워한다. 하지만 셜리가 남부 투어 도중 지독한 인종차별에 시달리는 모습을 보며, 그리고 이에 따른 문제들을 함께 해결해나가며 마음을 연다. 이렇게 마음을 열자 토니에게 궁금증이 생겼다. 왜 셜리는 지독한 일을 당하면서도 남부 투어를 다니는 걸까? 굳이 남부 투어를 다니지 않아도 셜리는 충분히 잘 먹고 잘살며 심지어 존경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왜?
"천재로서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바꾸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얼마나 어려운 일이냐면 천재로서도 충분하지 않다. 용기가 필요하고, 꾸준함도 필요하다. 돈 셜리는 흑인을 향한 세상의 시선을 바꾸기 위해 수많은 위협과 모욕에도 불구하고 남부로 콘서트 투어를 다닌 것이다.
케인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말 그대로 목숨을 바쳐가며 노력했다. 하지만 천재로서는 부족했다. 케인스라는 천재도 정치 싸움에서 밀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정책을 결정하는 자리에서는 물러났지만, 작가로 활동하며 여론 형성에 힘을 쏟았다. 그렇게 그는 어떤 상황을 맞닥뜨리더라도 좌절하지 않고 자신의 사상을 관철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그 성과는 20년 후에 대서양 건너 미국에서, 그리고 그의 사후 25년 후에 금본위제가 완전히 폐지되면서 이루어졌다. 세상을 바꾼다는 것은 이런 일이다. 케인스 정도 되는 천재가 수십 년간 온갖 방법을 총동원해야 이루어지는 일이다.
천재로서는 충분하지 않았다. 하지만 케인스는 천재에 머물지 않았다. 꾸준하고 당당하게 세상에 자신의 사상을 부딪혔다. 나는 이 모습이 케인스가 멋있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솔직히 천재라는 점은 나에게 그저 부럽거나 아니면 재수 없어 보일 뿐이다. 하지만 세상을 바꾸기 위해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치열하게 싸웠던 케인스의 모습은 정말 멋있었다. 그 꾸준한 모습이 진정한 존 메이너드 케인스라고 생각한다.
돈, 민주주의
그리고 케인스의 삶
※ 본 콘텐츠는 제작비를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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