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희 정승이 잠시 집에 머물 때의 일이다. 세종 : 황희를 들라 하라. 황희 : 아... 안돼... 하녀 둘이 시끄럽게 싸우다 황희에게 하소연하기에 이르렀다. 한 하녀가 사정을 이야기하자 황희가 대답했다.
"그래 들어보니 네 말이 옳구나."
그러자 다른 하녀가 자기가 옳다고 이야기했다. 황희는 이번에도 똑같이 대답했다.
"그래. 네 말도 옳구나."
이 광경을 보고 있던 부인이 한 소리 했다.
"두 사람이 서로 반대의 이야기를 하는데 둘 다 옳다고 하시면 어떡합니까? 한 사람은 틀렸다고 하셔야죠."
그러자 황희가 대답했다.
"부인 말도 옳소."
황희 정승의 유명한 일화다. 식자들이 말하길 대립하는 것을 하나로 포용하는 관용의 정신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정말 그런가? 실상은 줏대 없고 안일한 이야기에 불과하지 않은가. 황희의 태도는 갈등을 악화시킬 뿐이다. 해소되지 못한 갈등은 언젠가는 곪아 터진다. 시시비비를 가리어 모두가 만족하는 현명한 판결을 내려야 후환이 없다. 황희는 권위를 이용해 갈등을 그저 덮어 두었을 뿐이다.
저런 자세가 오래 사는 비결일 수는 있다. 이래도 옳고 저래도 옳고 만수산 드렁츩이 얼거져도 좋다던 이방원의 말을 따랐다면, 정몽주는 좀 더 오래 살 수 있었으리라. 역대 최고의 재상이라는 제갈량은 사소한 업무까지 제 손으로 처리하다 끝내 과로사했다. 그에 반해 황희는 아흔 살까지 장수했다. 저 안일하고 무사태평한 자세 덕분이다. 최소한 스트레스 받을 일은 없어 보이지 않나.
패기 넘치던 청년에게 가늘고 오래 사는 것은 매력 없는 일이었다. 오래 살기보다 옳게 살고 싶었다. 무엇이 옳은지 가려내야 직성이 풀렸다. 이를 위한 논쟁은 즐거운 일이었다. 학교에서는 토론 학회에서 활동하고, 온라인에서는 키배를 피하지 않았다. 세 치 혀를 비수 삼아 의표를 찌르는 쾌감은 짜릿했다. 상대의 논리에 무릎 꿇는 것도 즐거웠다.
그런데 논쟁이 즐거운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모두 옳다는 점이었다. 세상사 대부분은 옳고 그름을 명확히 나눌 수 없다. 갈등은 선과 악이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선과 선이 부딪히는 일이었다. 그럼 황희가 옳았던 걸까? 이쪽도 옳고 저쪽도 옳다고 다 옳다 하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그래서 논쟁이 필요하다. 논쟁은 상대를 이기기 위한 게 아니다. 서로가 양보할 수 있는 한계를 찾아 타협의 경계를 확인하는 일이다. 이를 위해 서로가 옳다고 치열하게 맞서야 한다. 그 맹렬한 공방과 양보의 미덕 사이에 민주주의가 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하며 살아왔다. 때로는 날카롭게. 그러나 이기기보다 타협하기 위해. 나의 주장을 충실히 변호했다. 그게 논쟁이고 키배이며 성실한 피드백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요즘 들어 생각이 바뀌었다. 계기는 <신과함께>였다. 영화를 혹평하다 지인과 말씨름이 오갔다.
"진짜 <신과함께>는 칭찬할 구석이 하나도 없다."
"왜 칭찬할 거리가 없어. 동양적 판타지를 구현했잖아. 사람들이 거기서 흥미를 느꼈다고 보는데?"
"아니 한국적 매력은 하나도 없고, 지옥도는 그냥 단테 <신곡> 보는 기분인데 이게 무슨 동양적 판타지야."
"그래도 지금까지 이런 걸 보여준 작품은 없었잖아."
"왜 없음? <풍운>은 동양 판타지 아닌가? <천녀유혼>, <촉산>, <월광보합>... 동양 판타지 많은데?"
"그래도 사람들은 그걸 흥미롭게 봤는걸."
"사람들이 재밌게 보면 그만인가? 그럼 비평을 왜 해. 전통과 비교해서 나은 게 보여야 칭찬을 하지. 비교할수록 구릴 뿐이잖아."
"그래도 누군가는 그 구린 걸 좋게 볼 수도 있어."
"그거야말로 영알못이지."
"누군가 좋게 봤다는 점, 그런 사람이 많다는 점은 인정해 줘야지."
"그걸 인정하겠다고 똥을 된장이라 부를 수는 없지. 아닌 건 아닌 거여."
"좋은 평론가라면 대중을 이해해야 한다며.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차마 말로 풀어내지 못하는 걸 네가 대신 설명해줘야 하는 거 아니야?"
"아니 대신 설명해줄 건덕지가 있어야지. 내가 보지도 않고 그러나? 요리조리 찍어 먹어 봐도 똥 맛 밖에 안 나니깐 똥이라 그러지."
"그래도 좋아하는 사람의 심정을 이해해줄 수는 있잖아."
"그렇다고 소신마저 버릴 수는 없지. 대중을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주관을 지키는 게 우선이잖아. 평론가가 여론에 휩쓸리면 그거야말로 최악이지."
"누가 그런 척을 하래?"
"아니 그럼 뭐라고 이해해주라는 겨?"
"그랬구나."
"그랬구나?"
"그랬구나. 너는 이 영화가 좋았구나. 그래서 혹평하니깐 화가 났구나. 이제야 알겠다... 이런 느낌?"
솔직히 당시에는 이 말이 그닥 와닿지 않았다. 도리어 상대를 무시하는 것 같았다. 스트레스를 피하는 방법일 순 있지만, 좋은 태도라고 생각지는 않았다.
그런데 다른 지인과의 술자리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다.
"내가 너한테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는데."
"뭔데?"
"내가 볼 때, 너는 글을 참 잘 써. 사람들도 인정해. 그런데 왜 그렇게 초조하게 굴어?"
"내가?"
"네 글을 변호하려고 너무 애를 쓰잖아. 이미 좋은 글이고, 좋다는 사람이 많은데, 굳이 그럴 필요 없어. 옛날부터 왜 굳이 어그로 종자들이랑 말을 섞는지 모르겠더라고. 얼마 전에도 막 열 올리면서 키배뜨고."
"나는 그게 성실한 피드백이라고 생각해. 타협의 경계를 확인하는 과정이랄까."
"이미 네 생각은 글에 다 있는데 뭐하러 그래. 오히려 네가 그런 식으로 민감하게 반응하면 좋게 읽었던 사람도 생각이 달라진다. 왜 저러지? 글에 자신이 없나? 그러다 보면..."
"없어 보이는구나."
"그렇지. 없어 보여. 이미 잘 쓴 글이 있고, 좋게 평가받는데, 그걸 굳이 변호하겠다고 용을 쓰면 없어 보일 뿐이야. 네가 아무리 좋은 글을 쓰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도 세상 모두를 만족시킬 순 없어. 그건 네가 용을 써도 안 되는 거야. 그걸 계속 붙잡고 늘어지면 없어 보일 뿐이지."
황희가 모두 옳다고 말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는 나라에서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영의정이었다. 집안에서는 제일 높은 어르신이었다. 그가 섣불리 시시비비를 가리느라 한쪽 편을 들었다면 어찌 됐을까? 여론이 쏠리고 우열이 갈린다. 끝내 언로(言路)가 막힌다. 두 하녀 중 한 하녀를 꾸짖으면, 꾸중 들은 하녀는 이후로 아무 하소연도 할 수 없다. 조금만 투덜거려도 "또 혼나고 싶으냐?" 구박만 받을 것이다. 나랏일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공명하게 판단할지라도, 그 결과로 권력이 기우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잘못한 쪽은 쪼그라들고, 잘한 쪽은 기세등등해진다. 이것이 굳어지면 공정한 판결이 아예 불가능해진다. 그래서 황희는 모두 옳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말이 얼마나 무거운지 잘 알고 있었다.
이리 생각하니 황희의 됨됨이가 새삼 크게 느껴진다. "이것도 옳고 저것도 옳다." 이리 말하면 줏대 없는 인간이 된다. 황희는 그런 취급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부인이 이를 비난하자 그 또한 옳다고 말했다. 이 여유는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여유는 언제나 자신감으로부터 나온다. 누가 감히 황희를 줏대 없는 소인배로 여기겠는가? 부인. 영의정도 마누라 앞에서는... 그가 이룬 학문적, 정치적 업적이 그를 보증한다. 쌓아온 행실이 선의를 대변한다. 황희라는 존재 그 자체. 이것이 황희의 자신감이다. 됨됨이다. 스웨그다.
나에게도 이런 여유가 필요하다. "그랬구나."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지 못한 이유는? 자신감이 없었기 때문이다. 안타깝지만 나에게는 아무런 업적이 없다. 나라는 존재를 돌아봐도 뭐 하나 내세울 것 없으니 글에 집착했다. 마치 유리알 다루듯 흠 하나 나지 않게 닦고 또 닦았다. 그 때문에 도리어 광채가 바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나는 무엇으로부터 자신감을 얻어야 할까? 아이러니하게도 그 또한 글이다. 내 글이 어디 공모전을 통과한 적은 없다. 글쓰기 실력에 100% 만족하지도 않는다. 나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 하지만 내가 쓴 글이 좋다. 이런 말 하면 우습겠지만, 나는 내가 쓴 글이 재밌다. 보고 또 봐도 질리지 않는다. 내 글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글 쓰라고 후원해 주는 사람도 있다. 나에게 황희에 버금가는 업적은 없지만, 내 새끼 같은 300편의 글이 있다. 이 정도면 자신감을 가져도 되지 않을까?
내 글에 자부심을 갖자. 내 소신은 내 글에 오롯하게 담겨있다. 독자를 설득하기 위해 고민하고 퇴고하고 노력했다. 그렇게 내놓은 글인데 굳이 변호하려 애쓸 필요는 없었다. 진짜로 필요한 것은 칭찬도 비난도 포용할 수 있는 이해심. 그리고 이를 위한 자신감이다. 누군가 비난한다고 글이 고꾸라지진 않는다. 언제나 비난보다 많은 칭찬을 받지 않았던가. 모두를 만족시킬 순 없다. 반론에 일일이 반박하기보다 상대방 입장에서 내 글을 돌아보는 게 낫다. 설령 글이 똥망이라 비난이 빗발쳐도 좋다. 그 덕분에 다음 글은 반드시 나아질 것이다. 똥망 글 한 편에 내가 똥이 되는 것도 아니다. 이미 150만 자가 넘는 좋은 글을 쓰지 않았나.
내 글을 믿자. 내 글은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내 글은 300의 가지와 150만 이파리가 피어있는 나무다. 바람이 분다고 이쪽으로 기우뚱 저쪽으로 기우뚱 민감하게 반응할 필요 없다. 때로는 비바람에 가지가 꺾이고 잎이 상할 수도 있다. 그 또한 내 글이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라. 대부분의 독자는 일부러 흠결을 찾지 않는다. 그들은 흠결이 아니라 나무를 본다. 그러니 여유를 갖자. 부러진 가지를 이으려 애쓸 필요 없다. 내가 애써야 할 일은 나무를 풍성하게 키우는 것이다. 그리하여 기꺼이 "그랬구나."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비바람마저 끌어안을 만큼 자라야 한다. 나는 그럴 능력이 있다. 아직 갈 길이 멀지만, 걸음을 멈춘 적은 없지 않은가.
도전하는 사람아
자신을 변호하지 말지어다
모든 도전은 그 자체로 이미 훌륭하다
굳이 애써 변호할 필요 없다
앞을 향해 나아가라
누구나 빨리 갈 순 없지만,
누구라도 멀리 갈 순 있다
행진하라
앞으로 앞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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