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영화 <1987>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절묘한 거리감
<1987>의 전반부는 절묘한 거리감을 유지한다. 감정에 매몰하여 신파로 빠지지도 않고, 그렇다고 지나치게 덤덤하여 쿨한 척하지도 않는다. 박종철의 사망 소식을 들은 가족은 낙담하거나 오열한다. 영화는 이를 과도한 기법, 예를 들면 슬로우 모션 같은 촌스러운 모습으로 담아내지 않는다. 그렇다고 애써 외면하지도 않는다. 슬프지만 담담하게 관조할 뿐이다.
이는 촬영과 연출만의 덕일까? 아니다. 서사도 한몫한다. 박종철의 죽음은 절로 오열이 튀어나오는 비극임이 틀림없다. 그의 가족이라면 말이다. 아무리 슬퍼도 관객은 오열하지 않는다. 왜냐고? 매몰찬 소리겠지만, 박종철은 내 새끼가 아니기 때문이다. <1987>의 서사에는 사망자 박종철만 등장한다. 내 새끼 박종철은 등장하지 않는다. 어려운 집안 살림에도 성실하게 공부해서 떡 하니 서울대에 합격하여 온 가족이 덩실덩실 기뻐하는, 그런 장면을 보여주지 않는다.
우리가 국가적 재난을 바라보며 피해자들을 보고 측은지심을 갖더라도, 땅이 꺼져라 오열하지는 않는다. 박종철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의 삼촌(조우진)이 통곡을 삼키며 두 눈 부라리고 부검을 지켜볼 때도, 그의 아비(김종수)가 흘러가지 못하는 재를 움켜쥐고 엎드려 울어도, 관객의 슬픔은 땅이 꺼지고, 마음이 무너지는 지경에 이르지 않는다. 결국, 남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이를 유도하듯 적절한 거리에서 감정 이입할 수 있는 인물도 배치한다. 동아일보 윤 기자(이희준)는 박종철의 가족이 아니다. 추모하기 위해 온 것도 아니다. "아니 왜 취재를 못 해!"라는 일갈에서 보듯이 그는 일하러 왔다. 그래서 목도할 뿐 오열하지 않는다. 윤 기자의 존재와 시선은 슬픔에 침몰하려는 관객의 목덜미를 잡아당긴다. "종철아! 잘 가그래이. 아부지는 아무 할 말이 없대이." 이 슬픈 대사에도 영화가 질척이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다. (애당초 질척이는 대사를 안 쓰면 된다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 대사는 박종철 아버지가 실제로 했던 말이었고, 이후 박종철을 추모하는 구호로 쓰였던 의미 있는 말이었다.)
<1987>의 절묘한 거리감은 이처럼 서사, 인물, 촬영, 연출 등 영화의 모든 요소가 화합하여 이루어낸 결과다. 충무로답지 않게 세련됐다. 나는 진심으로 감탄했었다.
▲ 절묘한 거리감에는 배우 김종수의 연기도 큰 역할을 했다.
신파의 등장
이토록 깔끔하던 영화였는데, 잘생긴 대학생 오빠가 등장하면서 분위기가 달라진다. 그리고 많은 것을 망친다. <1987>은 역사 속 인물을 다루며, 악역의 이해할 수 없는 증오마저도 근거를 제시하던 치밀한 영화였다. 그런데 이 잘생긴 오빠 놈은 등장부터 우연이라는 뜬구름을 타고 내려온다. 구름 타고 내려오다니 무슨 전우치냐? 맞는데? 게다가 생기기는 왜 그리도 잘 생겼는지 마스크를 벗는 순간 무겁던 공기를 산뜻하게 바꿔버린다. 목소리나 말투는 현실에서는 찾아볼 수도 없을 정도로 착한 척을 남발하는 데다, 카메라는 쭉 뻗은 다리를 요망하게 훑으며 잘생긴 오빠의 우월함을 찬양한다. 끝내는 석양을 등지고 후광 효과 작렬하며 "그게 마음대로 안 돼."라는 낯간지러운 대사를 뱉는다.
미안하다. 필자가 그의 멋짐을 시샘하여 다소 과하게 늘어놓았다. 요지는 잘생긴 오빠가 영화의 톤앤매너를 망쳤다는 점이다. 드라이하게 끌어오던 영화는 느닷없이 연희(김태리)와 잘생긴 오빠(강동원)의 촉촉한 이야기를 풀어낸다. 뜬금없는 등장이었다. 게다가 둘 사이의 갈등조차 동어반복이었다. 대의를 위해 개인사를 희생할 수 없다는 연희의 주장은 이미 한병용(유해진)과의 갈등을 통해 관객에게 전달되었다.
대체 저 잘생긴 놈이 왜 튀어나와야 한단 말인가! 나는 그놈의 잘생김에 삐치고, 무너진 톤앤매너에 삐치고, 이 모든 것이 신파라 불리는 대중영합주의라는 생각에 삐쳤다. 그리도 흥행이 소중했단 말이냐! 사실 겁나 소중하다. 흥행하자고 잘 끌어오던 작품에 이렇게 재를 뿌린단 말이냐! 너도 <택시운전사> 꼴이 되고 싶으냐! 아아... 도대체 왜 또 신파란 말이냐! 강동원 뒤로 후광이 비치던 지점에서 나는 크게 실망하고 영화를 업수이 바라보게 되었다.
그 장면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 톤앤매너를 무너뜨린 결정적 원인은 바로 저 눈, 코, 입일지도...
신파에 머물지 않았다
영화의 종반. 양초(왜 하필 양초일까?)를 정리하던 연희는 신문을 보고 울음을 터뜨린다. 그곳에는 잘 생긴 오빠가 있었다. 그리고 이한열이 있었다. 허구와 역사가 마주하는 순간이었다.
이한열의 묘사는 박종철의 그것과는 전혀 달랐다. 화면은 비극적 순간을 슬로우 모션으로 보여준다. 여기에 감정을 몰입시키는 아이템도 등장한다. 카메라는 연희가 사준 이한열의 운동화를 클로즈업한다. 이번에는 관조하지 않는다. 빠져든다. 이한열의 머리에서 흘러내리는 피 한 방울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이 모습이 관객의 뇌리에, 아니 가슴에 각인되도록 깊숙이 들어간다. 뒤이어 음악이 흐르고, 관객은 눈물이 복받쳐 오른다.
이런 차이가 벌어지는 이유는 뭘까? 이번에도 서사다. 먼저 눈여겨볼 부분은 강동원이 맡은 배역이 '이한열'이 아니라 '잘 생긴 오빠'라는 점이다. 박종철은 등장부터 박종철이었다. 역사적 인물이었다. 그래서 남이었다. 그런데 이한열은 이한열로 등장하지 않았다. 잘 생긴 오빠로 등장했다. 남이 아니라 님이었다. 역사적 인물이 아니라 우리네 오빠였다. 우리 오빠가 피 흘리며 쓰러진다. 관객은 관조할 수 없다. 박종철의 유가족처럼 오열하게 된다.
연희와 잘 생긴 오빠의 로맨스는 이 장면을 위해 존재한 셈이다. 느닷없는 로맨스가 신파임을 부정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1987>의 신파는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었다. 신파에 머무는 게 아니라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그 의미란 박종철도 이한열도 영웅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들이 대단한 영웅이라서 기꺼이 희생한 것이 아니다. 민중의 기대와 염원을 받아 영광스럽게 나선 것이 아니다. 단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들은 다만 우리 오빠였고, 내 새끼였다. 이를 강조하기 위해 영화는 다시 박종철을 등장시킨다. 그리고 단 한 마디를 전한다. "엄마." 그렇게 박종철마저 내 새끼로 만든다.
영화는 이 복받쳐 오르는 감정을 추스르지 않는다. 담담한 시선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대신에 뮤지컬처럼 환상적인 장면을 펼쳐낸다. 거리로 뛰쳐나간 연희의 시선에 들고일어선 민중이 보인다. 그러나 이번에는 판타지가 뜬금없지 않다. 우리는 잘 생긴 오빠로부터 이미 진실을 전달받았다. 그 진실은 광장에 모인 사람들이 위인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들은 우리 아빠, 엄마, 언니, 오빠, 동생, 친구... 그리고 우리 자신이다.
톤앤매너를 무너뜨리지 않고, 뜬금없는 신파를 더하지 않고, 이런 결말을 보여줬다면 아마 더 좋았으리라. 그런데 어떻게? 어떤 이야기를 풀어내면 이한열이 타인이 아니라 우리라는 진실을 가슴 벅차게 전할 수 있을까? 기발한 대안이 떠오르지 않기에, 나는 <1987>의 흠결을 탓할 자격이 없다. 그리고 탓하고 싶지도 않다. 이토록 뜨거운 민주주의를 전해주었기 때문이다.
※ 신파가 꼭 억지 눈물만 해당하는 것은 아닙니다. 과장된 가정 비극이나 싸구려 로맨스도 신파극의 단골이었습니다. (과장된 가정 비극과 싸구려 로맨스를 합치면 불륜이 나옵니다... 신파의 끝판왕이죠.)
※ 여러 평에서 지적받는 부분에도 불구하고, 제가 <1987>에 높은 점수를 선사했던 이유를 꼭 한 번은 풀어쓰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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