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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휴지통

트루맛 쇼


  "네. 감사합니다. OOO입니다."


  아버지는 퇴원하셨다. 처음에는 깁스도 하지 못하셨다. 발이 퉁퉁 부어서, 부기가 빠지기 전에는 수술도 깁스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했다. 다행히 수술은 면했다. 약간의 불편함을 평생 안고 살아가야 하지만, 수술하는 것보다는 낫다고들 말한다. 수술하면 평생 아프다고... 이제 부기도 빠지고, 깁스도 하시고, 집에서 요양만 하시면 된다. 꽤 오랜 시간 동안... 나는? 그 사이 아버지의 빈자리를 채우고 있다. 별수 있나. 이럴 때 써먹으라고 백수다. 백수(白手)인 줄 알았는데 백수(百手)였던 것 같다. 아주 일손만 필요하면 아무 데나 막 갖다 써먹는다.


  나는 군 시절 행정병이었다. 전화 받는 요령이야 도가 텄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여보세요."를 말하는 어설픈 모습 따위는 나에게서 찾을 수 없으리라. 감사합니다. OOO입니다. 예약하시려고요? 물론 가능합니다. 마치 몇 년은 일했던 사람처럼 멘트가 입에 착착 달라붙는다. 군 생활이 그닥 헛되진 않은 것 같다. 당시에는 목소리만 들어도 계급을 맞출 정도였다. 그 노하우는 빛이 바래지 않았다. 지금 걸려온 전화. 왠지 께름칙하다.


  "안녕하세요. 사장님이신가요?"

  사장님을 찾는 전화는 90%가 영업 전화다. 커피 머신, 식기 세척기, 에어컨 등등. 나라는 개인에게 이런 전화가 왔다면 화가 났을 것이다. 도대체 내 개인 정보는 어디서 알았냐고 따져 물었을 거다. 하지만 가게로 오는 전화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오픈된 번호이니깐. 그래서 홍보 전화를 받아도 화가 나지 않는다. 되레 측은한 생각이 든다. 이 사람들도 다 먹고살려고 이렇게나 아둥바둥 사는구나. 그래서 되도록이면 친절하게 이야기한다. 괜찮습니다. 이만 전화 끊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뭐 사실 죄송할 일은 아니지만, 죄송 좀 한다고 뭐 닳는 것도 아니고. 보통은 그렇게 빨리 전화를 끊는다. 빨리 끊어주는 게 저쪽에도 이득이니깐. 그런데 이번 전화는 기분이 영 꾸리꾸리했다.


  "무슨 일이신가요?"

  "아. 네. 사장님 안 계세요? 사장님하고 통화해야 하는 데요?"

  여기서 살짝 빈정이 상했다. 무슨 일인지 말해줘야 사장님께 말이라도 하지. 무작정 사장님 찾았다가 별거 아니면 구박은 누가 먹으라고 이런담? 뭐 어차피 내가 사장 대리로 나와 있었다. 까짓거 그냥 질러봤다.

  "에... 제가 사장입니더."

  목소리를 살짝 깔고, 다소 늙수구리한 말투로 대답했다.

  "어머, 안녕하세요. 저희는 채널 OO에서 방영 예정인 맛있는 TV OOOO를 제작하는 외주 제작사 OOOO라고 합니다."

  오잉? 이게 말로만 듣던 맛집 프로? 그럼 우리 가게도 TV에 나오는 건가? 상대는 내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재빠르게 말을 이어갔다.

  "이번에 새롭게 방송을 시작하게 되어서요. 사장님 가게를 섭외하려고 합니다. 첫 방송은 이미 스케줄이 잡혀 있고요. OOO의 경우는 5월 중순쯤에 방송에 나갈 예정입니다. 촬영은 4월 중에 진행되고요."

  4월이라. 4월이면 아직 아버지는 집에서 누워 계셔야 한다. 아직 내가 사장인 기간이다. 후후.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정말 좋겠는데? 이렇게 쓸데 없는 생각을 하는 동안 상대방은 여전히 쉬지도 않고 말을 이어갔다.

  "방송 시간은 6~7분 정도 진행될 예정입니다. 10분이 넘어가면 시청자가 채널을 돌려버리거든요. 출연자는 개그우먼 OOO씨와..."

  누군지 모른다. 역시 케이블이라 별거 없나?

  "개그맨 OOO씨."

  엇? 아는 사람! 이분 카레만 드시는 거 아니었나?

  "가수 OO 씨, OOO 씨가 출연할 예정입니다."

  헐? SM? 이거 생각보다 빠방한데?


  그런데 이런 방송에서 뭐가 아쉬워서 우리 가게를 찾는 거지? 뭐 우리 집이 청결하고, 양심적이고, 나름 맛도 정갈하니 괜찮은 집이긴 하다. 그래도 요즘 같은 스타 셰프 시대에 굳이 우리 가게를 올 이유가 없어 뵈는데...

  "그런데 저희 집은 어떻게 알고 연락하셨어요?"

  "OO동 한정식집 중에 OOO가 입소문이 자자해요. 다른 집은 그게 어디 한정식인가요? 백반집이지. OOO만 한 곳이 없죠."

  음... 나도 모르게 어깨가 으쓱했다. 칭찬은 역시 기분이 좋다.

  "허허. 말씀 고맙습니다. 촬영하시게 되면 저희가 뭐 준비할 게 있을까요?"

  "자세한 내용은 사전 미팅하면서 조율할 거예요. 대신 촬영 시간이 4시간에서 6시간 정도 걸리니깐 당일 예약은 좀 삼가시고요."

  6분 방송하는 걸 6시간 찍는다고? 흠... 인터레스팅...


  그런데 방송과정보다 더 관심을 끄는 부분이 있었다. 영화 <트루맛 쇼>를 보면 맛집 프로는 죄다 사기라고 한다. 수백, 수천만 원을 브로커에게 주고, 거짓 방송을 만든다. 지금 이 전화도 그럴 거라는 생각을 줄곧 하고 있었다. 분명 돈 얘기가 나와야 했다. 그런데 돈 얘기는 안 하고 계속 딴 얘기만 하고 있었다. 설마 진짜 맛집 방송인가? 돈 안 받나?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돈은 어찌 됩니까?"

  "아. 저희가 협찬 방송이라서요. 부가세 포함 660만 원입니다."

  협찬 방송이라... 그래 식당에서 협찬받고 그 돈으로 장비 값, 스태프 월급, 연예인 출연료 등등을 지불하겠지. 그럼 이게 광고지, 방송인가? 맞집 탐방이 아니라 광고주 탐방이겠지. 게다가 660만 원이라... 방송이 6분 이랬던가? 분당 100만 원이 넘네? 케이블이면 시청률 1%도 안 나올 거고. 차라리 그 돈으로 알바를 사서 댓글 작업하는 게 이득일 것 같았다. 지금까지 5분 정도 통화하면서 뺏긴 시간이 아까웠다. 순간 짜증이 급격하게 몰려왔고, 이성의 끈이 툭 끊어졌다. 나는 미친 척 해보기로 했다.


  "와... 방송 출연하면 660만 원이나 됩니꺼?"

  "그러믄요. 이게 많은 돈 같지만 절대 그렇지 않아요. 저희 방송사가 시청률이 2% 정도 나오거든요?"

  내가 볼 땐 아닌데? 0.2% 아님?

  "그럼 5천만 국민 중에 100만 명이나 돼요. 홍보 효과는 확실한 셈이죠."

  그러니깐 아니래두. 하지만 일단 속내는 감추고...

  "와... 대단하네요. 그렇게 좋은데 출연료를 600만 원이나 줍니꺼?"

  "네?"

  "방송에 나가믄 출연료 주는 거 아닙니꺼?"

  "아니 사장님 그게요..."

  "아닙니꺼?"

  ".... 뚝. 뚜.뚜.뚜."

  역시 통화가 끊어지면 '뚜. 뚜.' 소리가 나야지. 오랜만에 유선 전화로 통화했더니 "아나로그" 감성이 폭팔하는구만!


  "무슨 전화야?"

  내가 꽤 오래 통화를 하자 어머니께서 궁금히 여기며 물어보셨다.

  "응. 잡상인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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