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리뷰에는 치명적인 스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평소에는 경고문을 적지 않지만 이번에 특별히 경고문을 삽입하는 이유는, 이 영화의 경우 스포일러가 감상을 크게 방해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가까운 시일 내에 영화를 볼 예정이신 경우엔 리뷰를 나중에 봐주셨으면 합니다.
지난번에 펀치드렁크피지알님이 주목할 만한 작품으로 골라주셨던(http://www.pgr21.com/?b=8&n=54056) 데이빗 핀처의 신작 <나를 찾아줘>를 보았다. 2시간 30분이라는 긴 상영시간이 무색할 정도로 긴장감 넘치는 몰입감을 과시하는 작품이었다. 더불어 이런저런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 작품이기도 하다. 영화 속 이야기에 앞서 핀처에 대한 생각들도 함께 이야기 해보고자 한다.
당신은 변했어... 데이빗 핀처
▲ 데이빗 핀처의 연출작들
핀처에 대해 이야기 할 기회가 온다면 반드시 그의 변화에 대한 투정을 말하고 싶었다. 내가 어렸을 때 핀처에게 열광했던 것은 그의 현란한 영상 스타일 때문이었다. CF와 뮤직비디오 감독 출신답게 그의 영상은 꽤나 ‘MTV’스러웠다. <에일리언 시리즈>의 팬에게도, 핀처 팬에게도 외면 받는 <에일리언 3> 조차도 나는 너무 좋았다. 에일리언의 시점에서 인간을 쫓는 빠르고 정신없는 카메라 워킹이야말로 핀처의 정체성이라고 생각했다. <패닉 룸>의 롱테이크 신을 보며 “와 쩌네~”를 연발시키는 핀처를 사랑했다. 이러한 정체성의 정점이었던 <파이트 클럽>은 아직도 나의 베스트 무비 top5 안에 꼽는다. 그 당시 내가 사랑하던 또 하나의 감독이 대니 보일이었으니 어쩌면 이러한 스타일이 나의 취향에 정확히 부합했던 것 같다.
그런데 그런 핀처가 변해버렸다. 그 분기점이 된 작품은 <조디악>. 솔직히 처음 느꼈던 감상은 ‘음... 근데 뭘 어쩌라고’였다. 핀처의 영화치고는 너무 심심했다. 솔직히 따분했다. 내가 바라던 핀처의 영화는 이런 것이 아니었다. <세븐>의 섬뜩함, <파이트 클럽>의 패기도, <패닉 룸>의 쫄깃함도 없었다. 2시간 반짜리 ‘그것이 알고 싶다’를 본 느낌이었다. 살짝 덕력이 느껴지기도 했다. 제임스 카메론이 덕력으로 <타이타닉>을 찍었던 것처럼, 핀처도 범죄 스릴러 덕후라 이런 소재를 영화화 한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핀처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이하 ‘벤자민’)라는 멜로 영화를 들고 나온다. 처음에 이 영화는 보고 싶지도 않았다. 핀처가 나이가 들더니 연출 스타일도 바꾸고 끝내는 이런 말랑말랑한 영화나 찍고 있다고 생각하니 배신감이 들 정도였다. ‘나의 핀처는 이렇지 않아!’라고 외치고 싶었다. 개봉 당시 군 복무 중이기도 했고, 나중에 보자니 ‘멜로’라는 장르는 나의 관심을 짜게 식혀버리기에 충분했다. 그러다가 맘에 두던 친구가 좋은 영화라고 극찬을 하기에 한번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어 기대 없이 영화를 보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다시 핀처 빠돌이가 될 수밖에 없었다. 변해버린 그의 차분한 스타일은 영화의 여운을 그야말로 무한대로 확장시키며 몇 날을 <벤자민>의 아련함 속에서 허우적대게 만들었다.
이후에 <소셜 네트워크>로 평단과 관객에게 거장으로 인정받은 핀처는 그의 변화된 스타일을 이번 개봉작 <나를 찾아줘>까지 꾸준히 유지하고 있다. <조디악> 이전과 이후로 핀처의 스타일은 뚜렷하게 달라진다. 한 가지 확실한 점은 그의 변화는 절대 퇴보가 아니라 명백히 진보라는 것이다. 역대급 작품인 <소셜 네트워크> 뿐만 아니라 이번 <나를 찾아줘>에서도 혀를 내두르게 하는 부분은 단 한 컷도 버릴 장면이 없다는 점이다. 물론 이전 작품들도 웬만한 영화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잘 만든 작품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핀처와 비교하면 <세븐>은 허세가 많고, <패닉 룸>은 조잡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완전무결한 작품들을 만들고 있다. (차마 <파이트 클럽>은 깔 수가 없....)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예전의 핀처가 더 좋다. 그가 변화를 통해 거장 소리를 듣는 마스터피스를 찍어내고 있다 할지라도, 난 예전의 핀처가 그립다. 그 때의 속도감, 폭력성, 섬뜩함을 다시 보고 싶다. 그런데 어쩌랴. 그가 변했다는 사실은 맘에 안 들지만, 그의 영화는 끝을 모를 정도로 좋아지기만 하는 것을... 너무 잘하니깐 다시 예전처럼 돌아와 줬으면 하는 기대조차 사라져 버리게 만든다.
▲ 생긴 것도 잘생겼어. 젠장...
흔한 반전물?
개인적으로 스릴러와 호러장르의 영화들을 좋아한다. 그러다 보니 국내에 수입되지 않은 스릴러, 호러 영화들도 찾아서 보게 되는데, 최근 특히 2000년대 후반 이후로 양산형 스릴러들이 많이 나오는 느낌이다. 이 영화들의 특징은 훌륭한 스타일, 신선한 반전 그리고 작은 스케일이다. 아무래도 저 자본(그래봤자 웬만한 한국 메이저 영화보다 제작비가 많겠지...)영화이다 보니 반전의 재기발랄함에 초점을 맞춰 영화들을 양산하는 것 같다.
<나를 찾아줘>도 이러한 흔한 반전물이라고 느껴졌었다. 아내의 실종, 그리고 의심받는 남편, 가정불화. 여기까지 조합하면 스릴러 좀 봤다는 사람이라면 ‘이 모든 것이 아내의 계략인건가?’라는 의심을 할만하다. 그리고 그 의심을 해소하듯이 그녀의 계획을 차근차근 설명해주는 시퀀스가 나온다. ‘이렇게 영화가 마무리 되는 구나.’라며 시계를 보는 순간... ‘어라? 아직 플레이 타임이 한 시간이 남았네?’
아내 실종의 반전은 영화의 결말이 아니었다. 하긴 이 정도의 반전이 전부라면 앞서 말한 양산형 스릴러들과 비슷한 수준의 영화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반전은 영화의 끝이 아닌 진정한 시작이었다. 에이미(로자먼드 파이크)의 음모가 드러난 순간부터 영화는 흔한 반전물에서 핀처 영화로 탈바꿈하게 된다. 그리고 그 중심에 있는 것이 바로 여주인공 로자먼드 파이크이다. 그녀는 핀처라는 거장 감독에게 주눅 들지 않는 훌륭한 연기를 보여줬다. 사이코패스라는 점이 드러난 이후부터 에이미는 이전에 찾아볼 수 없었던 독특한 캐릭터로 탈바꿈 하며 영화의 깊이를 확장시킨다. 특히 데시 콜린스(닐 패트릭 해리스)를 말 그대로 ‘잡아먹는’ 장면에선 섬뜩한 공포를 관객에게 각인시켜 준다.
▲ 반전에서 한번, 결말에서 또 한 번. 에이미는 영화 내내 소름 돋는다.
위선을 바라보는 냉소
영화의 진정한 시작은 반전이었다. 이후에 나온 이야기들은 매우 복잡하며 또한 가치중립적, 혹은 전복적이라고 할만하다. 관객에게 간단하지 않은 질문들을 무참히 토해내는 느낌이다. 영화를 보고 난 후 가장 먼저 떠오른 질문은 ‘사이코패스 아내와 그런 아내와 사는 남편 중에 누가 더 미친놈인가?’하는 점이었다. 기자회견에서 임신 사실을 영혼 없는 눈동자로 읊조리는 닉(벤 에플렉)을 보고 있자니 내가 저 입장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무섭고 막막한 기분만 들뿐... 언론의 파렴치한 모습도 생각해볼 부분이다. 하지만 언론만의 잘못일까? 자극적인 언론은 자극을 찾는 대중 때문에 만들어진다. 그리고 닉과 에이미는 그런 언론을 통해 대중을 조종하고, 그 사이에서 언론은 시청률을 빨아먹는다. 영화 <폰 부스>에서 스투(콜린 파렐)가 했던 “대중에게 거짓말을 파는 언론에 거짓말을 판다.”라는 대사가 떠올랐다. <나를 찾아줘>에 등장하는 언론 그리고 대중은 그저 여론싸움의 도구일 뿐이었다. 진실? 그딴 건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한 형사(론다 보니, 킴 딕킨스)만 관심 있을 뿐이다. 에이미를 취조하는 형사들 사이에서 론다가 무시당하는 모습은 마치 진실은 무가치 하다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다시 ‘재결합’한 던씨 부부. 도대체 결혼은 뭐고, 사랑은 뭔지 이쯤 되면 혼란스럽다. ‘죽지 못해 산다.’는 말이 있는데 ‘죽이지 못해서 같이 산다.’는 느낌이랄까... 정말 에이미의 말대로 결혼은 원래 이런 걸까?
이러한 혼란에 유린당하는 것은 신뢰라는 가치이다. 당신이 보는 TV, 당신이 봤던 화목한 가정, 당신이 기대던 정의. 그 모든 것들이 위선이라면 도대체 우리는 뭘 믿고 살아야 할까? <나를 찾아줘>는 그에 대한 해답을 주지는 않는다. 그저 이러한 위선에 소름 돋게 만들 뿐이다. 핀처는 도대체 무슨 생각이었을까? 그가 생각하는 가장 모범적인 미국 중산층의 결혼생활을 그리고 싶었던 걸까? 마치 결혼이란 것 자체가 위선이라고 말하는 것 같은 결말을 보자니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사랑, 내 감정에 대해서도 의심하게 된다. 핀처는 이런 모습을 보며 냉소를 짓고 있지 않을까?
▲ 이걸 찾아야 되나 말아야 되나... 죽여야 되나 살아야 되나...
총평
<나를 찾아줘>에서 보이는 핀처의 연출력은 명불허전이다. 특히 첫 신을 마지막 신에 그대로 가져가면서 섬뜩함을 증폭시키는 몽타주는, 기발한 연출은 아니지만, 그가 편집의 달인이라는 점을 주지시키기에 충분했다. 배우들의 연기도 훌륭하다. 특히 로저먼드 파이크의 연기는 정말 대단했다. 사마귀나 거미 같은 포식형 벌레들이 떠오를 정도였다. 벤 에플렉의 연기도 좋았다. 영혼이 붕괴된 남자의 표정을 너무나 잘 보여줬다. 개인적으로 인상적이었던 것은 마고 던 역의 캐리 쿤이었다. 전체적인 밸런스를 조율하면서도 실재감이 넘치는 자연스러운 연기를 보여줬다.
영화를 보면서 도대체 뭘 믿고 살아야 하나 싶은 혼란에 빠졌는데, 시간이 지나자 내가 평소에 성경 말씀처럼 되새기는 사랑에 대한 대사가 떠올랐다. “사랑도 구라다.” 이 대사는 만화 『타짜』 1부에서 고니가 한 것이다. 그는 결국 사랑도 의리라며, 이전에 사랑하진 않았지만 앞으로 자기가 받은 사랑만큼 의리로 돌려주겠다고 말한다. 생각해보면 사랑만큼 허황된 것도 있을까? 불꽃처럼 일어나지만 그렇기에 차게 식어버리기도 하는 것이 사랑이다. 하물며 사랑도 이런데 결혼은 어쩌겠나... 그럼 세상 모든 부부들은 위선 속에서 살고 있는 걸까? 이미 애정은 식어버린 채 죽이지 못해 사는 것일까? 그것이 <나를 찾아줘>의 위선이 될지, 『타짜』에서 말한 의리가 될지는 우리의 노력에 달려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뭐 어쨌든 사랑이 구라라는 점에 있어선 나나 허영만 화백이나 핀처나 모두 동의하고 있는 셈이다.
한줄평
<하우스 오브 카드> 홈 에디션 ★★★★
※ 이성과 보면 안될 영화입니다. 여자 친구를 보는데 오금이 저린다거나 남자친구의 턱선을 보며 바람을 의심하게 될 겁니다.
※ 에이미의 범죄는 완전범죄가 아닙니다. 우선 콜린스의 별장 CCTV에서 에이미가 처음 등장할 때 콜린스의 배웅을 받는 점부터 의심스러울 것이고, 가장 치명적인 부분은 둘이 처음 접선한 곳이 카지노라는 점이죠. CCTV에 분명히 찍혀있을 겁니다. 물론 아무도 찾지 않겠지만... 에이미의 돈을 훔쳐간 2인조 강도도 있군요. 이렇듯 누군가 정의감을 가지고 파헤친다면 잡힐 꼬투리는 분명 남아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할 거라는 게 또 끔찍한 면이기도 합니다. 에이미는 평생 위선 속에서 살 수 있겠지요.
※ 바람피우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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