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영화 <후크>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누구나 그런 작품이 있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졸작이라 말하지만, 나에게만은 소중했던 그런 작품 말이다. 나에게는 <후크>가 그러하다. 이 글을 통해 스필버그의 흑역사 <후크>를 재조명하고자 한다. <후크>라는 작품의 명예를 되찾는다거나, 모두가 아니라고 말할 때 그렇다고 말하는 거창한 글은 아니다. 그저 이 작품이 나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왔는지에 대한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일 뿐이다. 세간에는 졸작으로 남았지만, 나에게만은 뚜렷하게 전해진 <후크>의 따뜻한 위로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쉿, <후크>를 함부로 말해선 안 돼
스필버그의 1991년 작 <후크>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별로 좋지 못하다. 아니 매우 좋지 못하다. 우선 상업영화의 객관적 지표라 할 수 있는 흥행을 살펴보자. <후크>는 공식적으로 7천만 달러의 제작비를 들여 월드와이드 3억 불의 수익을 올렸다. (참조) 그러나 스필버그는 공식적인 제작비보다 더 큰 비용을 사용했고, 배급사 트라이스타의 소유주인 당시 소니 대표였던 이데이 노부유키는 "5억 달러는 벌어야지 본전을 뽑는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참조) 거기다 스필버그의 차기작 <쥬라기 공원>이 월드와이드 10억 불의 대흥행을 기록해버리는 바람에, 이와 비교되며 더욱 초라한 성적으로 기억되고 말았다. 비록 참담할 정도의 흥행 참패는 아니었지만, 스필버그라는 이름값에 어울리지 않는 성적임에는 분명하다.
평단의 평가는 흥행보다 더 참혹하다. 더구나 당시의 평가가 아니라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이후의 혹평이기에 더욱 쓰리게 다가온다.
그토록 스필버그를 옭아매고 그토록 비평가들이 손쉽게 사용하던 단어, 피터팬 신드롬은 또 어떤가요. 스필버그의 이름에 피터팬 신드롬을 호(號)처럼 삽입하던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가 피터팬 신드롬을 벗어난 것이 <쉰들러 리스트> 혹은 <우주전쟁>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후크>는? 지금은 누구도 그 영화를 입에 올리지 않습니다. 스필버그의 팬들에게 <후크>는 볼드모트 같은 존재입니다. 절대 입에 올려서는 안 되는.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스필버그는 일생의 프로젝트 중 하나였던 피터팬 영화 <후크>를 찍은 다음 자신의 무의식을 옭아매던 피터팬 신드롬을 스스로 버렸던 것 같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피터팬이 켄싱턴가의 창밖으로 날아오르는 장면은 내 영화 최고의 순간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그가 네버랜드로 가자마자 영화는 아동용 연극처럼 돼버렸어요." (참조)
아마 팬들이 가장 싫어하는 영화는 <후크>일 것이다. 얼핏 보기엔 소재부터 지극히 스필버그적인 이 가족 판타지영화는 훌륭한 존 윌리엄스의 스코어에도 불구하고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달짝지근하고 어색하다. 줄리아 로버츠에서부터 더스틴 호프먼에 이르기까지 캐스팅도 조금씩 어울리지 않는다... 스필버그는 오랫동안 꿈꾸던 <후크>를 만들며 재기를 노렸으나, 사람들은 지나치게 80년대적으로 나이브한 ‘피터팬’ 이야기에 하품을 쏟아냈다. (참조), (참조)
<후크>의 지치고 딱딱해진 어른은 마음만 먹는다면 순식간에 아이의 순수성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영화들은 전 세계에서 통했다. 그는 더 부유해졌고 더 강해졌다. 그럴수록 그의 정신연령은 더 의심됐다. 잘 때도 양말을 벗지 않는다든가, 누가 큰소리만 쳐도 코피를 흘린다는 등의 에피소드들도 뒤늦게 회자했다.(『헐리웃 문화혁명』, 피터 비스킨드) 세기가 여러번 바뀌어도 여전히 어울려 다니는 기독교, 유아적 휴머니즘과 가족주의, 제국주의는 부시의 것인 만큼 스필버그의 것으로 보였다. 비록 그가 빌 클린턴의 친구이며 민주당의 열렬한 지지자라 해도. (참조)
<후크>에 대한 평단의 평가는 지당하다. <후크>는 순진한 시각과 뻔뻔한 진행, 그리고 오그라드는 대사와 연기를 보여준다. 한마디로 유치찬란하다. 더구나 그 찬란함의 표현마저 구시대적이다. 바즈 루어만의 <위대한 개츠비(2013)>가 유치찬란함의 극치를 보여준 것에 비하면, 수공업 기술에 의존하는 <후크>의 찬란함은 너무나 초라하다. 이러다 보니 "아동용 연극"이라는 스필버그의 자조야말로 <후크>에 대한 가장 객관적인 평가로 보일 정도다. 특히나 <쥬라기 공원>과 비교되며 '특수효과 진보의 과도기적 작품'으로 평가되기도 하고, '피터 팬 신드롬을 버리도록 만든 작품'같은 구시대적 사상의 상징처럼 평가되고 있다.
아동용 연극이 어때서
그러나 유치찬란한 아동용 연극이라는 점이 과연 비난받을 일일까? 적어도 대상이 어린이라면 아동용 연극이라는 평가가 그리 문제 되지 않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그들의 눈높이에 맞는 적절한 연출이라 평할 수도 있다. 스필버그는 '아동용 연극'으로 보인 것을 후회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 하지만 실제 <후크>의 여러 장면은 이 영화가 '아동용 연극'으로 비치는 것을 노렸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 해적 마을
네버랜드에서 눈을 뜬 피터 팬(로빈 윌리엄스)의 시야에 처음으로 들어온 것은 해적 마을의 전경이다. 중앙의 시계탑과 모래사장을 중심으로 건물들이 둘러서 있다. 특히 어느 한구석도 허전하지 않도록 꽉 채워진 세트 구성은 공간이 한정된 연극의 무대 구성을 연상시킨다. 더구나 시야를 가리던 천을 찢으며 전경이 등장하는 장면은 마치 막으로 가리어진 무대가 드러나는 것과 같은 느낌을 준다.
▲ 해적선 등장신
연극 무대의 막이 오르는 것을 표현한 장면은 또 있다. 후크(더스틴 호프만)의 해적선이 등장하는 장면에서 카메라는 돛을 따라 내려간다. 시선이 아래로 내려가는 장면이지만, 돛이 위로 올라가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시야의 상대성을 이용하여 막이 오르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게다가 배의 방향과 등장인물의 동선을 교차시키며 화면에 깊이감을 더한다. 이는 평면적인 스크린 속에 입체적인 연극 무대의 느낌을 부여한다. 이쯤 되면 연극처럼 보이는 것이야말로 스필버그의 노림수였다는 생각이 든다.
꽉 찬 전경은 연극의 느낌이 충만하지만 <후크>는 영화적 디테일도 놓치지 않았다. 후크의 해적선이 보여주는 디테일은 감탄을 자아낸다. 계단과 난간은 화려한 장식으로 꾸며졌으며, 대포와 밧줄은 당장 항해가 가능할 것처럼 보인다. 후크의 의상 또한 섬세하다. 갈고리에 새겨진 문양은 물론 구두의 리본까지 표현되어 있다. 그야말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세밀하게 꾸며졌다. 심지어 마을의 여자들은 모두 창녀에 나이도 많은 것이 세밀함이 지나칠 정도다. 이러한 디테일은 <후크>가 연극이 아니라 영화라는 점을 분명히 보여준다.
▲ 자동 카펫
거기다 이러한 디테일이 그저 돈 자랑으로 끝나지 않는다. 후크가 계단을 내려오는 장면에서 영화는 깜찍한 장치를 선보인다. 부관이 발을 구르자 계단에 있던 자동 카펫이 작동한다. 이는 후크와 부관의 성격과 관계를 표현하는 상징적 장치이다. 하지만 그 이전에 그저 신기하고 재밌는 장치이기도 하다. 아이들이 정말 좋아할 만한 장치이지 않은가! 이처럼 <후크>는 전경이라는 거시적 구도를 통해 연극적 성격을 드러내면서, 디테일이라는 미시적 구도를 통해 아동 취향을 자극한다. '아동용 연극'이라는 평가야말로 <후크>의 정체성을 가장 잘 표현한 칭찬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다른 이에게 이러한 모습이 하찮게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린 시절 나에게 꿈과 모험을 선사한 것은 소설 『피터와 웬디』가 아니라 스필버그의 흑역사인 영화 <후크>였다.
원망을 대변하다
이후 전개되는 이야기는 <후크>가 아이들을 위한 작품임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어린이 마을에 도착한 피터 팬은 고된 하루를 보낸 뒤 저녁 식사를 하게 된다. 그런데 식탁에 음식은 없고 빈 그릇만 가득하다. 아이들은 마치 소꿉놀이를 하듯이 음식을 먹는 척 빈 그릇을 뒤적인다. 피터 팬은 빈 그릇을 바라보며 입맛을 다실 뿐이었다. 그러던 중 마치 음식이 있는 것처럼 장난을 친다. 그러자 음식이 있다는 상상이 그의 눈앞에 진수성찬을 펼쳐내었다. 상상이 현실이 되는 감격스러운 장면이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판타지가 아닌 다른 곳에서 더 큰 쾌감을 받았다. 그것은 그들의 식사가 너무나 예의 없다는 점이었다. 식전 기도는 "감사!"라는 한 마디로 끝난다. 그리고는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마음껏 식사를 즐긴다. 식사 도중에 욕 배틀이 벌어지지만, 오히려 흥을 돋운다. 피터 팬의 드립이 찰지다. LOL을 하면 잘할 것 같다. 게다가 음식을 집어 던지며 장난을 친다. 그럼에도 누구 하나 뭐라 하지 않는다. 당시의 어린아이에게 눈치 보지 않는 식사는 너무나 즐거워 보였다. 소꿉놀이가 진수성찬으로 변하는 판타지보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즐겁게 음식을 집어 던지는 것이야말로 진짜 판타지였다.
▲ 피터 팬의 만찬
다음 장면은 식사 장면에서 선사한 쾌감의 정체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드러낸다. 피터 팬의 아들 잭(찰리 코스모)은 후크를 따라 고장 난 시계의 박물관으로 간다. 그곳에서 잭은 시계를 부수며 그동안 쌓여온 불만을 토로한다. "나한테 초콜릿 우유로 거품장난도 못 하게 했어!" "침대에서 뛰지도 못하게 하고!" "약속을 해놓고 한 번도 지키지 않았어!" "같이 놀아주지도 않았어!" 이런 잭의 대사는 아이들의 불만을 대변한다. 물론 잭의 대사는 다소 순진하긴 하다. 그러나 이러한 불만이 지목하는 것은 유치하지 않다. 그것은 자신을 이해해주지 못하는 부모에 대한 원망이다.
▲ 잭의 투정
이 장면은 어린 시절의 나에게 매우 통쾌하게 다가왔다. 비단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초등학생 때부터 입시지옥에 시달리는 한국의 아이들에게, 자기 목소리를 낼라치면 "말대꾸하지 마라."는 핀잔만 듣는 아이들에게, 잭의 망치질은 얼마나 통쾌하게 다가왔을까. 영화는 원망의 목소리를 대변한다. 그저 대신 말해주는 것뿐이지만 그것만으로도 통쾌함과 위로를 선사한다.
나에게 이 장면이 유독 통쾌하게 다가온 것은 개인적인 성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나의 어린 시절을 돌아보면 지금도 원망스러운 일들이 있다. 그렇게 스타크래프트를 좋아하던 아이였지만, 부모님 앞에서 게임을 한 적은 거의 없었다. 게임은 부모님 보이지 않는 곳에서 몰래몰래 해야 했다. 그렇게 영화를 좋아했지만, 비디오 한 편 빌려보겠다고 부모님과 입씨름을 해야 했다. (그 영화는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어둠 속의 댄서>였다. 심지어 뒤로 갈수록 재미가 없어서 더 억울했다. 그렇게 바득바득 우겨서 겨우 봤는데... 후...) 그저 공부에 방해되는 것이라면 어떤 것도 쉬이 허락해준 적이 없었다. 부모님 앞에서 배틀넷의 승리를 자랑할 수 있었다면, 함께 영화를 보고 이야기꽃을 피웠다면 지금쯤 나의 모습은 달라질 수도 있지 않았을까?
부모들이 자식의 꿈을 짓밟고자 그들을 옥죄는 것은 아닐 것이다. <후크>에는 피터 팬의 생모가 등장하는데, 그녀는 아기였던 피터 팬을 옆에 두고 이런 말을 한다. "학교는 일류여야 해. 화이트홀 고교. 옥스퍼드 대학. 졸업 후엔 물론 판사를 시킬 거고. 좋은 집 딸과 결혼시킬 거야. 이 아이 아빠처럼." 부모님 마음이 대게 이와 같을 것이다. 게임을 좋아한다지만 프로게이머가 될 리도 만무하고, 영화를 좋아해 봤자 평론가가 된다는 보장도 없다. 심지어 프로게이머가 되고, 평론가가 되었다 해도 미래가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러니 명문대를 강요하고, 판사가 되기를 바란다. 다 자식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일 따름이다.
▲ 피터 팬과 엄마
하지만 피터 팬은 엄마가 세운 자신의 미래 계획을 듣고는 그대로 도망쳐버린다. 어떻게 운전한 거지? 그것도 유모차를? 나도 어린 시절 도망쳐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어떤 아이들은 삶으로부터 도망치는 안타까운 선택을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한 비극으로 세계 제일인 나라에 사는 아이에게 <후크>는 각별하게 다가올 수밖에...
<후크>는 아이들의 원망을 대변하였다. 그것으로부터 쾌감을 선사한다. 아쉽게도 영화의 결말은 이러한 이슈에 집중하지 않고 그럭저럭 스필버그다운 해피엔딩으로 마무리한다. 확실히 마지막 전투장면은 액션이라 부르기엔 지나치게 유치하고 엉성하다. 그러나 그 유치한 결말마저도 즐겁고 사랑스러운 추억으로 남아있는 것은 이 영화가 갑갑한 어린아이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동용 연극'이 스필버그의 의도였다면, <후크>는 형식과 내용에서 그 의도를 잘 살려낸 작품이지 않을까?
마치며...
영화 <사도>에 대한 한줄평 중에서 "영조는 아들이 아닌 세자를 원했고, 사도세자는 왕이 아닌 아버지를 원했다."라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이 비극은 왕가의 전유물이 아니다. 지금도 많은 부모들이 자신도 모르는 새 영조가 되어 자식을 사도세자로 만들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부모와 자식에게 <후크>는 '아동용 연극'을 넘어 의미 있는 작품으로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졸작으로 평가되는 <후크>가 어떻게 나에게 소중한 작품이 될 수 있었는지 적어보았다. 비단 <후크>뿐만 아니라, 세상 어떤 졸작이라도 누군가에게는 가슴을 울리는 걸작이 될 수 있다. 나는 사람들이 그 울림을 기꺼이 타인과 나누기를 바란다. 그래서 졸작이었던 영화가 가슴을 울리는 걸작으로 새롭게 거듭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런 마음으로 내가 <후크>를 보며 느꼈던 감동을 이렇게 나누고자 한다.
좋은 영화는 관객과 긴밀히 소통할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비평은 그러한 소통의 자리를 마련해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글을 통해 <후크>라는 영화와 새롭게 소통하는 독자가 생겨나길 바라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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