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고편 수준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케일럽(돔놀 글리슨)은 세계 최대 검색엔진 회사 '블루북'의 프로그래머이다. 그는 사내 행사에 당첨되어 회장 네이든(오스카 아이삭)의 저택에서 일주일을 지낼 기회를 얻는다. 그러나 헬기를 타고도 한참을 날아가야 도착할 수 있는 회장의 저택은 알고 보니 일종의 연구시설이었고, 케일럽이 뽑힌 이유는 휴양이 아니라 네이든의 실험을 돕기 위함이었다. 그 실험은 네이든이 개발한 인공지능 에이바(알리시아 비칸데르)의 튜링 테스트였다. (튜링 테스트 : 기계가 인간과 얼마나 비슷하게 대화할 수 있는지를 기준으로 기계에 지능이 있는지를 판별하고자 하는 테스트로, 앨런 튜링이 1950년에 제안했다.)
장르를 업데이트하다
인공지능을 다루는 이야기는 이미 너무나 많이 다뤄져 왔다. (그중에서 최고를 꼽으라면 주저하지 않고 <블레이드 러너>를 꼽겠다.) 더구나 그 인공지능을 만든 사람이 매드 사이언티스트라면 이건 빼도 박도 못하고 『프랑켄슈타인』의 재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이유로 1931년에 영화 <프랑켄슈타인>의 개봉 이후, 감독들은 이 이야기를 그대로 답습하지 않고 <가위손>, <바이센테니얼 맨>, <그녀>와 같이 다양한 시선으로 장르에 함몰되지 않기 위해 노력해왔다.
그런데 <엑스 마키나>는 이러한 변형이 전혀 없다. 새로운 이야기도 아니고 장르 비틀기도 아니다. 오히려 철저하게 장르적 관습을 따른다고 할 수 있다. 인공지능과 이를 창조한 매드 사이언티스트 그리고 순진한 주인공이 펼치는 이야기는 『프랑켄슈타인』의 그것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 그렇다면 <엑스 마키나>는 그저 21세기의 영상기술에 기대어 진부한 이야기를 재탕하는 형편없는 영화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장르를 철저히 따르는 것이야말로 감독(알렉스 갈랜드)의 의도라고 봐야 한다. 대신 그는 이 진부한 이야기의 디테일을 최신 버전으로 업데이트하였다. 인공지능과 관련한 기술과 과학을 현대적이고 현실적으로 바꾸어 영화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었다. 더불어 기존에 장르적 허점으로 남았던 이슈들을 보완하는 모습도 보여준다. (그러면서도 핵심에서 벗어나는 이슈에 대해서는 장르적 관습을 과감하게 활용하는 영리함도 갖고있다.) 새로운 버전으로 '업그레이드'한 것은 아니지만, 관련 데이터를 최신으로 훌륭하게 '업데이트'한 셈이다. 그리고 업데이트한 내용은 전기 양의 꿈이 더는 멀지 않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 혁신과 전통을 동시에 담았다
작지만 꽉 차있다
<엑스 마키나>는 화려함을 자랑하는 SF가 아니다. 영화 속 장소는 대부분 네이든의 연구시설로 한정되어 있다. 이러한 방식은 <큐브>나 <더 문>같은 느낌을 준다. 제작비를 절약하는 재기발랄한 연출이다. 그렇다고 무작정 아끼기만 하는 영화는 아니다. 미래적 분위기를 자아내거나 극 전개에 필수적인 역할을 하는 미장센들은 충실하게 구현되어 있다. 인공지능 로봇 에이바를 구현한 CG도 꽤 훌륭하다. 규모는 작지만 필요한 것들만 잘 채워넣었다. 전반적인 스타일도 이처럼 과하지 않은 깔끔함이 돋보인다.
튜링 테스트를 기반으로 하다 보니 영화는 대화를 위주로 진행된다. 덕분에 인공지능과 관련한 철학적 질문을 깊이 있게 파고들 수 있었다. 이 점은 지적유희를 자극한다는 장점이 있지만, 자칫 영화를 다큐멘터리로 만드는 지루함을 야기할 수도 있다. 감독은 여기에 미스터리 스릴러를 가미하며 극적 긴장감을 유지시킨다. (떡밥 투척과 회수, 그리고 새로운 떡밥의 등장 타이밍이 매우 좋다.) 칭찬하고 싶은 점은 인공지능에 대한 지적유희와 미스터리 스릴러가 따로 놀지 않고, 서로가 호응하며 이어간다는 점이다. 인공지능에 대한 의심은 인간에 대한 의심으로 이어지고 나아가 자아와 본질에 대한 의심으로 이어지며 철학적 깊이와 극적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대화만으로 충분한 긴장감을 준다는 면에서 <맨 프럼 어스>가 연상되기도 한다. (이 영화도 연극화시키기에 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 그럴듯하다. SF는 이럼 성공 아닌가?
총평
장르를 충실히 따르고 있으나 장르에 먹힌 영화는 아니다. 오히려 장르를 보완하는 영화이다. 하지만, 비록 그것이 노림수였다 할지라도, 장르적 한계를 넓히지 못했다는 점은 아쉽다. 기술이던, 내용이던 SF에게 새롭다는 것은 일종의 의무이다. 여성의 젠더에 대한 폭력적인 시각도 아쉽다. 이것이 영화의 중요한 소재이고, 캐릭터를 드러내는 수단이었기는 하지만 그것 자체에 대한 고민이 부족하다는 느낌이다.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전체적으로 굉장히 만족한 영화다. 1,200만 달러라는 적은 예산으로 철학적 깊이와 극적 재미를 모두 갖춘 웰메이드 SF 영화를 만들었다. 감독이 차후에 본업인 각본가로 돌아설지, 또다시 감독을 맡게 될지는 모르겠으나 그의 차기작이 무척 기대된다.
한줄평
『프랑켄슈타인』의 충실한 업데이트 ★★★☆
※ 1,200만 달러면 135억으로 충무로에서는 대규모 투자지만, 저쪽 시장에선 저예산입니다. 뭐 1억 달러는 넘겨야 돈 좀 썼다고 자랑하니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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