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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휴지통

거짓말 표절


  소설 <댓글부대>는 국정원 여론조작 사건에서 모티브를 따온 소설이다. '팀-알렙'이라는 바이럴마케팅 업체가 비밀 권력 조직으로부터 의뢰를 받아 인터넷 여론을 조작한다는 내용이다. 그들은 진보 성향 커뮤니티와 진보 지식인을 공격하고, 나아가 청소년 사이에 보수 성향의 슬로건을 유행시킨다. 그 과정이 매우 그럴듯하다. 실제 인터넷 여론 조작을 모티브 삼은 에피소드가 있어, 커뮤니티 활동을 해 본 사람이라면 "아~ 그때 그일!"하며 가물가물한 기억을 끄집어낼 것이다. 그러다 막히면 나무위키를 켜겠지.


  그중에서 내가 가장 또렷하게 현실의 원형을 떠올린 것은 바로 다음의 이야기였다.


임상진 그렇군요. 다시 <가장 슬픈 약속> 이야기로 돌아가시죠.


찻탓캇 뭐, 예. 제가 올린 글은 '저는 영화산업 노동자 OOO이라고 합니다'라고 시작하는 게시물이었습니다.


이 게시물의 화자는 5년차 촬영 스태프이고, 언젠가는 영화감독이 되고 싶은 꿈이 있는 남자, 하지만 지금은 끼니를 걸러야 할 수준으로 생계가 어렵지요. 주방보조와 택배 아르바이트를 하지만 이것도 쉽지 않습니다. 영화 촬영에 들어가면 하루 평균 열다섯 시간도 넘게 현장에 매달려야 하니까 알바도 다 그만둬야 해요. 이쪽 업게 관행상 제대로 근로계약도 맺지 않고, 사실 정확한 근로조건도 모릅니다. 제일 마지막에 만든 영화가 <가장 슬픈 약속>을 이번에 개봉하는 나인쓰레드픽처스 작품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받았어야 할 임금 340만 원이 아직도 밀린 상태입니다. 언젠가 주시려니 하고 기다리면서 카드빚으로 연명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썼어요. '이번 <가장 슬픈 약속> 보도자료를 보니 대한민국의 모든 노동자들을 위하는 마음으로 영화를 만드셨다고 돼 있더군요. 이 영화가 OO전자뿐 아니라 대한민국 모든 사업장의 노동 현실을 바꾸는 데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고 감독님이 말씀하셨더군요. 저도 노동자니까, 한번 바라봅니다. 4대보험 같은 건 꿈도 꾸지 않고, 야근수당은 필요 없습니다. 제 밀린 임금 340만 원 주세요. 당장 밀린 고시원비와 핸드폰 요금을 내야 하는데 돈이 없습니다...'


이 글을 텍스트 그 자체를 올리지 않고 화상 캡처를 한 것처럼 jpg 파일로 바꾼 다음에 '영화인들 보는 비공개 사이트에서 퍼온 글'이라는 식으로 바꿔서 다음 아고라나 네이트 판 같은 대형 게시판들에 올렸어요.


임상진 그게 다 거짓말이었단 말이죠?


  아마 모델이 된 영화는 김태윤 감독, 박철민 주연의 <또 하나의 약속>일 것이고, OO전자는 삼성전자일 테다. 그런데 개봉 당시 저런 식의 흠집 내기가 존재한 기억이 없었다. 물론 <또 하나의 약속>은 흥행에 실패했다. 아무래도 저예산 영화였고, 그 만듦새가 영 좋지 않았다. 하지만 영화는 외압에 시달렸다. 기득권은 지극히 기득권스러운 방식으로 영화를 압박했다. 상영관을 줄이고, 언론 리뷰를 막았다. 삼성전자의 반박 입장도 기사로 나왔다. 현실은 그랬다. 소설처럼 기막히고 천재적인 발상은 없었다.


임상진 인터넷에서 반응은 어땠나요?


찻탓캇 일단 전파속도는 엄청 빨랐어요. 글을 올리자마자 그야말로 마른 들판에 불이 번지듯 온갖 게시판으로 퍼져갔어요. 사람들도 알고 있었던 거죠. OO전자에서 노동 탄압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모르지만, 영화판의 노동 조건에 비하면 천국 같은 직장일 거라는 사실을. 노동자 권익이니 남녀평등이니 하는 말들 입에 달고 사는 사람들 중에 자기 단체 직원들 권익 챙겨주는 사람은 많지 않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즈음에 사회적으로 민감한 이슈를 건드리는 영화가 너무 많이 나왔잖아요. <도가니> 이후로. 그 감독들이나 제작사들이 그런 이슈를 실은 돈벌이로 활용하고 있다는 걸 사람들도 눈치채고 불편해하고 있었어요. 그러다가 임금체불 건이 딱 터진거죠.


임상진 휘발성 있는 재료였죠. 논란이 꽤 심하게 벌어졌었겠네요.


찻탓캇 막 엄청나게 화제가 되고 관련 글이 쏟아지고 그런 건 아니었어요. 며칠씩 순위에 오르는 글에 비해서는 조회수나 댓글 수가 많이 모자랐습니다. 저는 사람들이, 특히 진보적인 성향의 사람들이 그 글을 애써 외면한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선뜻 동의하기는 싫고, 그렇다고 대놓고 반박할 수는 없고, 그런 느낌? 그것만 해도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거죠. <가장 슬픈 약속>이 화제가 되는 걸 저희가 올린 글이 차단했으니까요.


일단 진보 쪽 게시판에서는 이 영화에 대해서 말하는 거 자체를 꺼리는 분위기였어요. 누가 이 영화에 대해서 '두 시간 내내 가슴이 먹먹했다. 잊지 않겠습니다'라고 감상평을 달면 득달같이 보수 쪽 누리꾼들이 '아따, 우덜식 노동착취는 착한 노동착취랑께요?'라고 댓글을 달았죠. 그런 분위기에서 누가 영화 얘기를 하고 싶겠어요? 원래 영화는 입소문 장사잖아요. 특히 <가장 슬픈 약속>처럼 사회성 있는 영화들은 사실 보고 나면 기분도 찜찜하고 보는 동안 재미가 있는 것도 아니니까. '나 이거 봤다' 하고 다른 사람들한테 자랑하려는 마음으로 보는 거예요. 그런데 임금 체불 논란이 그런 움직임을 완벽하게 막았죠. 그리고 뭐 조용했다는 것도 다 포털이나 진보 쪽 사이트 애기고, 보수 게시판들은 아주 난리가 났어요. '좌좀들 위선이 다 드러났다'부터 해서 '감독이랑 제작자에게 산업화 열사 표창장을 줘야 한다'는 개드립까지...</font>


  소설은 여론 조작의 결과도 극적이었다. 스스로 꺼리게 만드는 기가 막힌 전략이었다. 그런데 이 비슷한 것을 나는 분명히 본 적이 있었다. 그게 <또 하나의 약속>은 아닌데. 분명 근래의 일인데. 나는 지난 영화 리뷰들을 하나씩 돌아보다가 번뜩 한 영화를 떠올렸다. 바로 <군함도>다. <군함도>는 개봉 전에 출연 배우의 증언이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곧이어 반박문이 올라왔다.






▲ 더 많은 반박문은 다음 링크를 참조하시길 바랍니다. 링크






  결국, 최초 증언자는 글을 삭제하고 튀었다. 당시에는 그저 관심종자의 헛짓거리라고 생각했다. 논란은 반박문과 글삭튀로 인해 흐지부지되었다. 그리고 영화는 개봉했고, 한국판 <진주만>을 보여주며 (폭발-신파-폭발-감동) 평단과 대중으로부터 매몰차게 까였다. 논란은? 이미 폭망한 영화에 진실게임이고 나발이고 무슨 소용인가. 어차피 망했는데. 뭐, 그게 어찌 되었는지는 나에게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당시 논란을 복기하며 가물가물했던 기억을 또렷하게 닦아놓았다는 사실이다. 이런 게 머릿속을 맴돌면 잠이 안 오니까.


  그런데 좀 이상하지 않은가. 올해 개봉한 영화와 관련한 에피소드를 가지고 벌써 이렇게 소설을 쓰다니. 장강명이란 작가는 천재인가? 나는 급히 책을 뒤집었다. 뒤표지부터 한장 한장 거꾸로 넘겼다. 표지와 속지를 넘기자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1판 1쇄 인쇄 2015년 11월 20일. 1판 1쇄 발행 2015년 11월 27일."

  그랬다. 소설 <댓글부대>는 <군함도> 논란이 있기 두 해 전에 출간되었다. 다른 에피소드처럼 현실을 가공하여 소설을 쓴 것이 아니었다. 현실이 소설을 가공한 것이었다. 달리 말하자면 <군함도> 논란은 소설을 따라했다. 거짓말을 표절했다. 이를 깨닫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 인터넷 여론 조작은 생각보다 가까이 있었다. 만약 그때 다른 스태프들이 입 다물고 있었거나, 혹은 그 거짓말이 진실과 닿아 일말의 노동착취라도 있었다면, 나는 거짓을 진실이라 믿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군함도>는 개봉 이후에도 여러 논란에 휩싸였다. 영화의 완성도에 관한 논란에는 별 관심이 없다. 그거야 뭐 각자의 감상이 있을 뿐이다. 그걸 강요하며 논란을 키우는 일은 그냥 바보력 경쟁이다. 그 외의 논란이 문제다. 스크린 독과점 논란과 식민사관 논란이 있었다. 스크린 독과점 논란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식민사관 논란은 좀 석연찮은 데가 있다. 조선인 악역이 등장하고, 더 악랄하게 보인다 하여 이것이 식민사관이 되는 걸까? (심지어 더 악랄하다는 점은 주관적 해석이다) 없었던 이야기를 만든 것도 아니다. 친일파 후손이 득세하고 독립운동가 후손은 고통받는 현실을 생각하면 조선인 악역의 등장은 과거 청산의 메시지로 읽을 수도 있다. 그러나 식민사관 논란은 들불처럼 번져나갔고, 류승완 감독은... 삐졌다. (링크) 하긴 대표적인 진보 성향 감독으로 이명박근혜 정권에 소위 찍혔던 사람을 뉴라이트, 식민사관으로 몰아갔으니 오죽 열불이 터졌겠는가.


  소설 <댓글부대>를 보고 나니 논란 뒤에 무언가 존재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증거도 없고 뇌피셜에 불과하지만, 그런 망상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덕분에 오늘도 밤잠을 설쳤다.


참조 : 나무위키 군함도(영화)/평가와 논란






※ https://pgr21.com/?b=8&n=74424 좋은 리뷰 덕분에 재미난 소설을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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