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영화 <매드맥스 : 분노의 도로>(이하 '매드맥스')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핵전쟁으로 황폐해진 미래. 기름과 무기 그리고 물을 독점한 임모탄 조는 살아남은 인류를 노예로 지배한다. 아내와 딸을 잃고 생존만을 생각하며 사막을 방황하던 맥스는 임모탄의 부하들에게 납치되어 '피노예'가 되고 만다. 한편 임모탄 조의 폭정에 항거하여 사령관 퓨리오사와 임모탄의 여인들은 녹색 지대를 향해 탈출을 감행한다. 이에 임모탄은 부하들을 이끌어 이들을 추격하고, 그 와중에 '워보이' 눅스는 맥스를 '피주머니'삼아 차에 매단 채 추격의 선봉에 선다. 모래 폭풍이 몰아치는 분노의 도로 위에서 퓨리오사, 맥스, 눅스 그리고 임모탄의 불꽃 튀는(이거 레알) 추격전이 펼쳐진다.
중2병과 멋스러움의 차이를 만드는 것
오리지널 시리즈의 감독 조지 밀러가 이번 신작에서도 메가폰을 잡았다는 점은 팬들의 기대를 높여주는 요소이기도 했지만, 내심 불안감을 낳는 부분이기도 했다. 21세기의 쿨내나는 관객들에게 80년대의 중2병스러운 스타일이 통하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관람 전에는 그러한 촌스러움을 감독이 어떻게 비껴갈 것인지를 기대했었다.
그러나 직접 대면한 <매드맥스>는 단점을 회피하는 겁쟁이가 아니었다. 오히려 과거의 감성을 전면에 내세우며 쿨내나는 관객을 정면 돌파하는 당당한 모습을 보여준다. 실상 <매드맥스>에서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표현한 스타일은 클리셰의 집합이라 할 수 있다. 오프닝에 등장하는 도마뱀 섭취 장면은 30년 전이라면 모를까 지금으로써는 딱히 인상적이라 할 수 없다. 각종 전투차량(war rig)의 디자인, 임모탄의 마스크, '워보이'들의 분장, 퓨리오사의 기계팔 등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그려내는 미장센들에서도 독창성을 찾기는 어려웠다. (그나마 참신하게 다가온 장면으로 '모유 공장'이 있었다. 하나 이 또한 뱀파이어 디스토피아에서 그려지는 '혈액 공장'과 유사하기에 조지 밀러만의 독창적인 것으로 치부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럼에도 <매드맥스>는 촌스럽거나 오글거리게 다가오지 않는다. 되려 그러한 미장센들이 멋있다고 느껴진다. 그 이유는 스케일과 디테일에 있다. 앞서 언급한 각종 미장센들은 모두 훌륭한 디테일을 보여준다. 특히 감독이 직접 하나하나 디자인했다는 전투차량의 모습은 그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울 정도였다. 그중에 백미는 역시 불꽃 기타다. 솔직히 전투에서 군악대는 그 존재 자체가 중2병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움직이는 허세 덩어리가 멋스럽게 다가온다. 기타에 화염방사기까지 달고 있는 괴랄함에 가슴이 뛴다. 그 이유는 불꽃 기타 트럭의 스케일과 디테일이 촌스러움을 압도하기 때문이다. 그 압도적인 광경에서 중2병스럽다는 생각은 화염방사기의 불꽃처럼 뇌리에서 휘발돼버릴 뿐이다.
충실한 묘사는 미장센의 가장 기본적인 덕목이자 또한 궁극적인 덕목이기도 하다. 조지 밀러는 철 지난 클리셰를 참신하게 재포장하기 보다 스케일과 디테일에 힘을 쏟는 정공법으로 30년의 세월을 극복했다. 정말 상남자스러운 돌직구 연출이 아닌가!
▲ 어설펐다간 저런 꼴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액션을 완성하는 것
<매드맥스>가 갖는 참신함의 결여는 미장센 뿐만 아니라 액션(촬영)에서도 드러난다. 실상 영화의 전개 대부분이 액션으로 이루어지는 만큼 이를 얼마나 잘 다루었느냐가 영화의 가치를 판가름하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그런데 그 액션에서 참신함을 느낄 수가 없다. 전작인 <매드맥스3>로부터 30년, <매트릭스>의 영상 혁명으로부터 2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의 관객에게 <매드맥스>의 자동차 추격신은 진부하게 다가올 수도 있다. 차라리 <본 아이덴티티>의 아기자기하고 섬세한 도심 추격전이 훨씬 짜임새 있고 참신할 것이다. 실상 <트랜스포머>로 대표되는 마이클 베이식의 뻥뻥 터지는 추격신과 별로 다르지 않다. 액션 자체도 근래 언급되는 액션 영화들의 단점으로부터 자유롭지도 않다.1) 그러나 그러한 단점에도 불구하고 <매드맥스>의 액션은 짜릿하고 긴장감 넘친다.
이를 두고 많은 사람들이 아날로그 감성의 효과라고 말한다. 하지만 참신했던 <인셉션>의 무중력 액션도 역시 아날로그 촬영의 결과였다. (많이 알려졌다시피 놀란 감독은 CG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더구나 매드맥스의 촬영은 CG 사용에 꽤 적극적인 편이다. 폭발장면에선 어김없이 CG가 등장하며, 상징적인 파편을 클로즈업하며 CG임을 드러내는 연출도 꺼리지 않는다. 과거처럼 CG의 사용이 눈에 띌 정도로 어설프다면 모를까, 실제와 CG가 거의 구분되지 않는 요즘에 CG라는 이유만으로 액션을 폄하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렇다면 <매드맥스>의 액션이 긍정적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미장센과 액션이 서로 잘 호응하고 있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미장센을 통해 구축된 <매드맥스>만의 독특한 분위기는 진부할 수 있는 액션을 작품에 어울리는 독특한 액션으로 탈바꿈한다. 절정의 희열을 이끌어내는 것은 단순히 힘과 기술만이 아니다. 로맨틱한 분위기와 감미로운 전희 또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매드맥스>의 액션 그 자체는 흔해 보일 수 있지만, 그 앞의 독특한 전희가 액션과 호응하며 상승효과를 가져온 셈이다.
다음으로 등장인물들의 적절한 죽음을 들고 싶다. 드라마 <왕좌의 게임>의 원작 『얼음과 불의 노래』의 작가 조지 마틴은 인터뷰에서 "사람들은 영화에서 주인공이 수십 명에 둘러싸여 위기 상황에 놓여도 그 상황을 극복할 거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인공이니까요. 그래서 주인공이 죽을까 봐 걱정하지 않죠. 하지만 저는 독자들이 주인공이 위험에 처하면 같이 걱정하고 무서워하길 바라요."라고 말했다. 그의 철학 덕분에 <왕좌의 게임>은 매 시즌 주연급 출연자들이 픽픽 죽어 나가고 있다. 그런데 <매드맥스>의 내러티브에서도 이와 비슷한 모습이 엿보인다. 탈출 과정에서부터 선역이 죽어 나가더니, 귀환 시퀀스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는다. 실상 이야기의 중심은 시리즈의 주인공 '맥스(톰 하디)'가 아니라 '퓨리오사(샤를리즈 테론)와 여인들'인데, 그 여인들이 죽어 나가니 보는 사람의 염통이 쪼그라들 수밖에 없다. 결국, 죽음이라는 내러티브 요소가 액션을 더욱 쫄깃하게 만들어주는 셈이다. (조지 마틴이나 조지 밀러나 서양 어르신들은 좀 무서운 것 같다... 아니면 이름이 문제인가?)
비판적으로 들여다보면 <매드맥스>의 액션은 그 자체로는 혁신적이지 않다. 차라리 올 초의 <킹스맨>이 기존 액션의 진부함을 비꼬는 연출을 하는 등 재기발랄한 액션을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매드맥스>의 액션도 좋다. 조지 밀러는 참신한 아이디어로 액션을 무장하기 보다 영화의 본질에 가까운 연출의 영역에서 액션을 끌어올린다. 스타일과 내러티브가 호응하는 액션을 표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 근본적인 부분을 캐치하였기에 <매드맥스>의 액션은 묵직하고 긴장감 넘치게 다가온다.
▲ 폭발장면이 멋있게 다가오는 영화가 얼마만인가!
스토리가 빈약하다고?
우선 <매드맥스>는 내러티브보다 스타일에 방점을 두는 영화다. 영화에서 관객에게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설명하는 것은 나래이션이 아니라 시타델의 풍경이다. 자주 하는 이야기지만 지나치게 내러티브에 집중하는 관람 자세는 영화에 대한 편협한 시각을 낳는다. 때로는 내러티브보다 다른 것을 즐길 줄 아는 자세도 필요한 법이다. 오히려 영화라는 매체를 고려한다면 내러티브보다 스타일에 주목해야 옳다. 이야기만 볼 거라면 차라리 소설을 보는 것이 낫다.
<매드맥스>의 스토리는 직선적이지만 무작정 단순하다고 비판할 수는 없다. 영화의 스타일은 마초적이지만 담겨있는 이야기는 페미니즘적이다. 물과 젖으로 상징화되는 여성성의 힘이 불과 쇠로 상징화되는 남성성을 어떻게 극복하는지 '워보이' 눅스(니콜라스 홀트)를 통해 보여준다. 더불어 마지막에 귀환하기로 한 결정 또한 흥미로웠다. 기존의 포스트 아포칼립스 영화들이 '약속의 땅'을 찾아가는 것을 보여준 데 반해, <매드맥스>는 불의를 정복하는 선택을 보여준다. 나는 이 부분에서 만화 『베르세르크』의 명대사 "도망쳐서 도착한 곳에 낙원은 없다."가 떠올랐다. 요즘 나라 꼴이 말이 아닌 상황이다 보니, 퓨리오사의 도시탈환이 무척 상징적으로 다가왔다.
또한, 앞서 언급했듯이 액션을 더욱 쫄깃하게 만드는 등장인물들의 희생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여기에 적당히 완급을 조절하는 모습까지 보여준다. 조지 밀러는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내느냐에 따라 영화의 장면들이 더욱 그럴듯하게(핍진성) 다가올 수 있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이처럼 <매드맥스>는 탈출과 귀환이라는 직선적인 스토리 속에 과하지 않은 적절한 상징을 담고 있다. 또한. 그 전개에 있어서도 연륜이 느껴지는 안정감을 보여준다. 스토리가 단순할지언정 빈약하다고 할 수는 없다. 더구나 그 내러티브가 스타일과 호응하면서 가져오는 상승효과를 생각한다면 이야기가 별로라는 평가는 <매드맥스>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 단순하지만 빈약하지 않다. 그리고 단순함은 흠이 아니다.
[미장센 + 촬영 + 내러티브]의 삼위일체
<매드맥스>를 부분적으로 해체하면 혁신적으로 뛰어난 부분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요소들이 한 편의 영화로 하나가 되었을 때 호응을 통한 상승작용을 일으킨다. 어찌 보면 이러한 시너지 효과는 영화라는 매체에 있어 가장 기본적인 연출 능력 중에 하나일 것이다. 하나 이를 이루는 영화는 많지 않다. 똑같은 폭발신이라도 <트랜스포머>는 폭죽놀이에서 그쳤지만, <매드맥스>는 그 속에 이야기와 상징을 담았다. 이런 노감독의 연륜이 오늘날 관객들의 가슴을 엔진 실린더처럼 펌프질 치게 만들었다.
참조
1) http://www.huffingtonpost.kr/2014/12/06/story_n_6279730.html
※ 이 영화는 정말 4D로 봐야 합니다. 저는 3D나 4D를 별로 선호하지 않았는데, <매드맥스>만큼은 꼭 4D로 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 퓨리오사의 샤를리즈 테론과 눅스의 니콜라스 홀트의 열연이 돋보입니다. 샤를리즈 테론이야 <몬스터>에서 이미 연기력에 대한 논쟁을 불식시켰는데, 이번에도 명성에 걸맞은 연기를 보여줍니다. 니콜라스 홀트는 영화를 거듭하면서 갈수록 성장하고 있어, 지켜보는 입장에서 어디까지 성장할지 기대를 품게 하더군요. 이 둘에 반해 맥스가 좀 쩌리가 된 기분이 듭니다.
※ <킹스맨>에 이어 인상깊은 액션영화가 또 나왔습니다. <킹스맨>이 펑크락 같은 기분이었다면, <매드맥스>는 그야 말로 헤비메탈이더군요.
'무비쌤 윤PD'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무뢰한> - 질척한 하드보일드 멜로 (0) | 2015.05.29 |
---|---|
<스틸 앨리스> - 병마와 싸우는 사람들을 위한 위로 (0) | 2015.05.19 |
<스물> - 유치하니깐 청춘이다. (0) | 2015.05.05 |
<차이나타운> - "재미없어?" "아니" "그럼 재밌어?" "아니..." (3) | 2015.05.02 |
<약장수> - 현실은 역시 쓰다 (0) | 2015.04.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