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여름 극장가는 100억이 넘는 제작비를 들이부은 작품이 쏟아지면서 영화팬에게 많은 기대감을 안겨주었다. <군도>는 감독 때문에 기다려졌고, <명량>은 소재 덕분에 기대했었다. 그러나 <해적 : 바다로 간 산적>(이하 '해적')은 사실 별 기대를 하지 않았다. 더구나 개봉전에 어설퍼 보이는 스틸컷이 공개되면서 무관심을 넘어 아예 기대감이 짜게 식어버렸던 작품이다. 그러나 부득이한 사정에 의해 자의반 타의반 영화를 관람할 수 밖에 없게 되었고, 오늘 드디어 <해적>을 만나고 왔다.
<해적>은 졸작이다
본격적인 이야기에 앞서 이론적인 이야기를 해야겠다. 영화의 형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영화가 서술되는 체계인 형식 체계와 실제 촬영과 관련된 스타일 체계이다. 수식으로 표현하자면 아래와 같다.
영화 = 형식 체계(내러티브 + 비내러티브) + 스타일 체계(미장셴 + 촬영 + 편집/몽타주 + 사운드)
즉 일반적인 대중 영화의 경우 내러티브와 스타일을 따져 보는 것이 영화를 판가름 하는 잣대가 된다. 따라서 내러티브가 탄탄할 수록, 스타일이 독특할 수록 평단의 평가는 좋아진다. 반대로 이러한 부분에서 엉성함을 보이면 냉혹하게 까이는 것이다. <해적>은 이러한 관점으로 분석하자면 졸작이라 말할 수 밖에 없다. 내러티브에서는 우연적 요소와 개연성 부족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스타일...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스타일이라 부를만한 개성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내러티브도 스타일도, 영화 미학적으로 아무것도 성취가 없다. 집으로 돌아오는길에 분석을 해보자니 이걸 영화라고 인정해야 하는지 고민이 될 정도였다. 굳이 하나 성취를 꼽자면 영상 정도? 줄타기 CG가 거슬리긴 했지만 대체적으로 대부분의 CG나 촬영, 미장셴은 훌륭한 편이다. 하지만 이것이 내러티브와 호응하며 영화적 가치를 올려주는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그냥 때깔만 고울 뿐이다.
▲ 줄타기는 확실히 어설펐다. 이 분야 간지 최강은 아직까지는 <놈놈놈>인걸로...
허이구~ 영화를 무슨 분석할려고 봅니까? 재밌자고 보는 거지? (고광렬이 톤으로)
하지만 이 자리에서 고백하건데, 나는 영화를 보면서 졸지도 않았고, 지루함에 몸을 베베 꼰적도 없으며 인상을 찌푸린 적도 없다. 딱 한번 흑묘(설리)가 첫 대사를 내뱉었을때 한숨을 쉬긴 했다. 기대한 대로 연기가 아쉬워서... 이후로는 정말 오랜만에 소리내고 웃으면서 영화를 봤다. 개그가 정말 재밌었다. 어떤 건 다소 1차원 적이기도 했고, 어떤 건 고전 유머를 조선 해양 버전으로 각색하기도 했고, 어떤 건 노골적으로 다른 영화에서 따온 장면도 있었다. 한마디로 유치하고 뻔한 개그들이었다. 하지만 나란 놈은 웃음이 헤픈 남자라 그런 개그에서도 빵빵터지고 말았다. 그렇다. 재밌게 봤다는 말이다. 영화를 보는 동안은 정말 아무 생각 없이 낄낄대고, 아니 '푸하하하하' 거리면서 봤다. 영화를 재밌을려고 보는 거지, 분석할려고 보는 것은 아니지 않나. 그런면에서 티켓값이 아깝지는 않았다.(물론 할인받았다. 평일 대낮 가격이 10000원 이라니 -_-;;) 글의 흐름상 지금에서야 언급하긴 하지만 개그의 긴장도를 꾸준히 유지시켜주는 에피소드의 배치는 탁월하다. 편집에 대해서는 소기의 성과가 있다고 봐도 될 듯 싶다.
배우들의 개그 연기도 정말 좋았다. 오달수, 박철민, 김원해, 신정근, 조희봉, 정성화 등 언제나 감초역할을 톡톡히 해주시는 조연 분들의 연기는 이 영화에서도 여전하다. 비록 개그감은 떨어졌지만 손예진, 이경영, 김태우도 무게있는 역할에 어울리는 카리스마 있는 모습을 보여줬다. 가장 칭찬하고 싶은 배우는 김남길이다. 생각외로 능글능글한 개그 연기가 잘어울렸다. 잘생긴 얼굴하고 안어울리게 전혀 어색함이 없었다. 그리고 유해진. 캬~ 유해진!!! 그 덕분에 정말 소리내며 웃을 수 있었다. 그리고 설리는 연기를 심각하게 못하진 않는데 그냥 재능이 없는 것 같다. 이뻐서 봐주기엔 임자있는 몸이라 별로 애정이 안간다....
<해적>을 보고 있노라면 개그에 있어 뻔뻔함이 얼마나 중요한지 느낄 수 있다. 앞서도 말했듯이 모든 개그 상황이 세련되고 깔끔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유치하고 뻔해도 전혀 움츠러 들지 않고 당당하게 웃음을 펼친다. 잘생긴 김남길이 개그 연기를 하는데 어색하지 않은 것은 그가 그만큼 뻔뻔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뻔뻔함에 내 손발은 오그라 들려다 펴지게 되고 개그를 유쾌하게 즐길 수 있었다. 저질이라거나 유치하다는 것을 두려워 하지 않는 뻔뻔함은 <해적>의 매력이다.
▲배우들 표정이 전부 살아있다. 정말 얼굴만 봐도 웃긴다
그놈의 백성
사실 유쾌하게 즐긴 영화인데다가, 허세로 작품성을 들이대는 영화도 아니다 보니 이렇게 분석하고 싶지 않았는데 짚고 넘어가야 할 건 짚고 가야겠다. 이번에는 본격적으로 썰을 풀기 전에 한 평론가의 한줄평을 언급하고자 한다.
황진미 : 백성과 국가의 길항적 관계까지 품은 유쾌한 액션 코미디 ★★★☆
이분 참고로 백성 마니아다. <명량>(2014)에서도 백성을 그렇게 부르짖더니 <해적>에서도 또 이러신다. 망언도 이런 망언이 없다.
<해적>에서 등장하는 백성은 <광해, 왕이 된 남자>(2012) 이후에 한국 사극에서 보여주는 백성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부정한 관리에게 짓밟히는 존재이다. 당연하게도 우리의 해적과 산적 분들이 이들의 억울함과 고통에 공감하여 정의를 몸소 행하신다. 왜?? 도대체 왜 이 영화에서 '백성과 국가의 길항적 관계'가 등장해야 하냔 말이다. 결국 개연성을 엿바꿔 먹은 덕분에 극의 흐름을 방해하는 요소가 되어버렸다. 더구나 다른 플롯과 호응도 안되는 처참한 편집과 황당한 등장 타이밍 덕에 백성과 관계된 내용은 간단히 윈도우 무비메이커로 잘라내도 극 전체에 아무런 무리가 없어 보일 정도다. 가장 모범적이고 완전무결한 사족이었다.
<명량>에서도 그렇고, <해적>에서도 그렇고 백성의 의미를 통해 대중의 공감을 얻고자 하는 것 같은데, 영화 전체와 전혀 호응하지 못함에도 이렇게 억지로 넣는 모습을 보자니 답답하고 안타깝다. 그나마 <명량>은 이 부분에서 감동을 받는 사람들도 있는 만큼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볼 수도 있지만, <해적>은 도대체 누가 백성의 의미를 언급해 줄런지 -_-;;; 황진미 평론가 외에 더 있을까? 이쯤되면 영화팬으로서 걱정이 된다. 이러한 '백성 연출'이 한국 사극의 장르적 관습이 되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 그것이다. 가뜩이나 착취와 폭정에 힘든 분들인데, 필요할 때만 불렀으면 싶다.
▲ 백성 좀 고만해 이것들아!!!!
총평
예전에 이순재 선생님이 MBC 연예대상에 나와서 상을 타면서 '연기자가 예능인 잔치에서 상을 뺏어가는 것 같아서 죄송하다.'는 수상 소감을 말씀하신 적이 있다. 그 때 문득 들었던 의문이 시트콤은 극으로 봐야하나 예능으로 봐야 하나 하는 점이다. 방송국이 상주는 분야를 보면 그들은 예능으로 분류하고 있는 것 같은데, 사실 딱히 어느쪽이라고 말하기 애매하긴 하다. <해적>을 보고 난 뒤, 옛날에 했던 이 고민이 다시 떠올랐다. <해적>은 극일까? 아니면 예능일까?
영화적인 형식을 갖추지 못했다고 평할 수 밖에 없지만, 재밌는 것 또한 사실이다. 다른 영화들도 관객을 웃기겠다는 열망이 있다면 <해적>처럼 열심히 웃겨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신파 넣고 감동 넣어서 개죽 쓰는 것보다 찰진 고추장 같은 개그 한스푼만 비벼 넣어도 기분좋은 한끼는 만들 수 있는 법이다. 어렵고 고리타분하게 보지말고 너그러운 시각으로 봐준다면 분명 시원한 재미가 있는 영화다.
한줄평
개그와 유치함의 키치적 승화를 담은 유쾌한 액션 코미디 ★★★
※ 이후 첨언에는 약한 스포가 들어있습니다.
※ 황진미 평론가의 시각은 참으로 이해할 수가 없네요. 한줄평 보면서 사전 찾아보기도 처음이네요. 길항적이 무슨 소린지 몰라서.... 그래서 저도 한줄평을 좀 허세 스럽게 써봤습니다만... 별로 있어보이진 않는군요 -_-;;
※ 중간에 에로틱한 장면이 전개 되려는 찰나 땡중놈이 나타나서 훼방을... 솔직히 김남길, 손예진이면 남녀노소 누구나 만족하는 조합 아닙니까? 리쎌웨폰에선 비슷하게 가다가 잘만 엎어뜨리더만 왜 우리는 거까지 안가니 ㅠ,ㅠ
※ 많은 분들이 <명량>을 보시고, 영화에서 백성의 모습에 감동을 느끼신 분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처음에는 비판적이었으나 <명량>속 백성에 대한 나름의 의의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명량>의 백성은 '참여하는 백성'입니다. 관객은 이러한 백성에 감정이입하게 되고 명량해전이라는 역사적 순간의 영광을 함께 하는 것이죠. 그렇기에 단순히 신파적 요소를 넘는 참여의 의미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포장하더라도 영화 전체와 호응하지 못하고 따로 논다는 점은 변하지 않습니다.
'무비쌤 윤PD' 카테고리의 다른 글
[리뷰]<캡틴 아메리카 : 윈터 솔져> - 정치 담론의 경쾌한 변주 (스포있음) (0) | 2015.01.21 |
---|---|
[리뷰]<셰임> - 무엇이 더 부끄러운가? (0) | 2015.01.21 |
[리뷰]<왕의 남자> - 처선을 중심으로 (1) | 2015.01.21 |
[리뷰]<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 보면 지는 거다 (0) | 2015.01.21 |
[리뷰]<명량> - 묵직한 역사의 감동 (0) | 2015.01.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