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생각휴지통

(58)
남자끼리 막 저녁 장사를 개시했을 때였다. 한 커플이 가게로 들어섰다. 남자는 자주 보던 얼굴이다. 까무잡잡한 피부와 매끄러운 턱선이 인상적인 미남이었다. 여자도 만만찮았다. 새하얀 다리는 쭉 뻗었고 오똑한 콧날 위로 주먹만 한 눈망울이 그렁그렁 달렸다. 잘 생기고 이쁜 것들이다. 누가 찌르지도 않았건만, 허전한 옆구리가 콕콕 쑤셔왔다. 여자는 두리번거리며 미심쩍은 시선으로 가게를 훑었다. "자기 여기 와 봤어?" "여기 진짜 맛있다니깐." 남자는 우리 식당을 좋아했다. 사실 우리 음식이 맛있기도 했지만, 남자는 계산할 때마다 "여기 정말 맛있어요."라는 말을 연발했다. 몇 번 보지 않았음에도 내가 그의 얼굴을 기억하는 이유였다. "몇 번 와봤나 보네?" "두어 번?" "누구랑 왔는데?" "음... 혼자 왔지."..
어떤 고쳐쓰기 바이마르 공화국. 정식 명칭은 Deutsches Reich(독일국). 1919년 2월 수립되어 1933년 나치 제3 제국(제3 라이히)의 아돌프 히틀러에 의해 망할 때까지 존속한 독일의 공화국 체제다. 바이마르 공화국은 일종의 별명이다. 헌법이 만들어진 도시인 바이마르(오늘날 독일 중앙의 튀링겐 주에 있다.)의 이름을 따 훗날 붙여졌다. ▲ 바이마르 시 전경 바이마르 공화국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선진화된 헌법을 보유하고 있었다. 원체 뭔가 만드는 데 철저했던 독일인답게 각국 헌법의 좋은 점만 따서 바이마르 헌법을 만들었다. 지방자치가 보장된 기존 독일 제국 헌법에 미국의 대통령제, 영국의 내각제와 수상제, 스위스의 국민투표제 등이 모두 바이마르 헌법에 들어왔다. 바이마르 헌법이 얼마나 선진적이었냐면, 당..
알파고가 울린 여자 2001년의 어느 여름날. 버스 안에서 고등학생 남녀가 설전을 벌였다. "언젠가는 인공지능이 이길걸? 체스는 이미 인공지능이 더 뛰어나잖아." "체스랑 바둑은 다르다고." "아. 물론 다르긴 다르지. 이름도 다른데." "야. 장난하지 말고." 남자가 약 올리듯 어깃장을 놓자 여자가 정색하듯 받아쳤다. "알았어. 그런데, 농담 아니고, 체스나 바둑이나 다를 게 뭐 있냐? 둘 다 놓을 수 있는 경우의 수에는 한계가 있잖아." "체스는 경우의 수가 얼마 안 되니깐. 그래서 인공지능이 이긴 거야. 그런데 바둑은 경우의 수가 거의 무한대라고." "거의 무한대는 무한대가 아닌걸." "야. 삼백육십일 팩토리얼(361!)이라고. 이건 부르는 이름이 따로 없을 정도로 큰 숫자란 말이야." "그래도 무한대는 아니니깐. 삼..
[단편] 비결 사랑에도 갑을이 존재한다. 더 좋아하는 쪽이 을이다. 당연하게도. 그녀를 처음 만난 건 대학 2학년 때였다. 신입생으로 들어온 그녀는 내가 감히 말을 걸기도 어려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녀의 존재감은 실로 대단했다. 가뜩이나 남자만 득시글한 학내에서 그녀는 자연스럽게 여왕이 되었다. 남학생들은 벌떼처럼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누구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가장 처참하게 차인 건 신입생 대표였다. 그는 5월 대동제 때 그녀에게 공개 고백을 했다. 전교생이 보는 노천극장에서 커다란 목소리로 "사랑합니다. 제 마음을 받아주세요."라고 소리쳤다. 그녀는 받아주려는 듯 침착한 걸음걸이로 무대에 올랐다. 그러나 "마음은 고맙지만, 받아들일 수 없어요."라며 교과서 같은 대답으로 거절하고 다시 침착한 걸음걸..
돗대를 피우고, 칵테일을 마시고, 반지를 뺐다. 마지막으로 일회용 라이터를 돈 주고 산 적이 언제던가? 흡연자의 방에는 일회용 라이터가 굴러다닌다. 책상 서랍, 옷장, 책꽂이, 냉장고? 처치 곤란이다. 그래서 일회용 라이터를 사는 일은 없다. 하지만 그런 날도 있는 법이다. 주머니를 뒤져봐도 라이터가 없다. 백팩을 내려놓고 뒤져봐도 라이터가 없다. 혹시나 담배 피우는 사람이 있을까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불 정도 빌려주는데 인색한 사람은 없다. 하지만 사람이 없다. 점심시간을 갓 넘긴 오후의 도로에는 행인조차 보이지 않았다. 새까만 아스팔트 위로 어지러이 아지랑이가 일렁였다. 담배가 땡기는 풍경이었다. 걸어온 길을 돌아갔다. 편의점에 들어서자 상쾌한 공기가 귀밑부터 뒷목을 감싸 안았다. 역시 에어컨은 인류 최고의 발명품이다. 미사토 당신은 언제나 옳았어..
트루맛 쇼 "네. 감사합니다. OOO입니다." 아버지는 퇴원하셨다. 처음에는 깁스도 하지 못하셨다. 발이 퉁퉁 부어서, 부기가 빠지기 전에는 수술도 깁스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했다. 다행히 수술은 면했다. 약간의 불편함을 평생 안고 살아가야 하지만, 수술하는 것보다는 낫다고들 말한다. 수술하면 평생 아프다고... 이제 부기도 빠지고, 깁스도 하시고, 집에서 요양만 하시면 된다. 꽤 오랜 시간 동안... 나는? 그 사이 아버지의 빈자리를 채우고 있다. 별수 있나. 이럴 때 써먹으라고 백수다. 백수(白手)인 줄 알았는데 백수(百手)였던 것 같다. 아주 일손만 필요하면 아무 데나 막 갖다 써먹는다. 나는 군 시절 행정병이었다. 전화 받는 요령이야 도가 텄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여보세요."를 말하는 어설픈 모습 ..
커뮤니티, 소통, 어그로 그리고 나 커뮤니티 활동을 하면서 싫어하는 것이 생겼다. 무플이다. 누가 그랬던가? 무플보다 악플이 낫다고. 나는 이 말에 매우 공감한다. 무관심만큼 무서운 것이 없다. 무관심이 조회 수로 드러날 때도 있다. 하지만 정말 기분이 울적한 것은 조회 수는 높은데 댓글은 없는 경우이다. 한 번 독자의 입장에서 상상해봤다. 왜 기껏 들어와 읽어놓고 아무 말도 달지 않았을까? 내 글이 뭐라 한마디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완벽하기 때문일까? 그럴 리가... 정답은 글이 재미없기 때문이다. (단순한 의미의 재미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독자가 게시물을 클릭한다. 들어와 한두 문단을 읽는다. 글이 재미없다. 스크롤을 내린다. 그리고 다른 게시물을 찾는다. 너무나 당연하면서도 엄정한 과정이다. 그리고 이 과정은 쉽사리 예측할 수..
날개를 접습니다 백수생활 5년째 어머니는 다 닳아연골이 없어진 무릎 때문에새벽마다 잠에서 깨어시린 무릎을 부여잡으십니다.아들아. 아들아.엄마는 이제 쉬고 싶단다.아니, 쉬지 않으면 안 된다고 의사가 그러더라. 내 꿈은 영화평론가였습니다.나름의 철학도 있었습니다.현학와 허영이 없는 평론.아이부터 노인까지누구에게나 쉽게 다가가는 평론.그런 글을 쓰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꿈이 다 무슨 소용입니까?목구멍은 포도청이고부모님의 삶은 지우개처럼하루하루 닳아 없어지고 있습니다. 돈이 많다고 행복한 것은 아니라지만,돈이 없으면 행복할 수 없습니다.그리고 꿈도 없습니다. 내가 펼친 꿈의 날개는어찌나 보잘것없었는지돈 한 푼 되지 않았습니다.돈이 안 되는 꿈은꿈이 아니라 망상입니다. 나는 날개를 접습니다.구름 위로 날아오르지 못할 바엔땅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