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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득과 유혹

성공적인 데이트의 본질을 알려드립니다

어째서 연애는 즐거운 경험이 아니라 스트레스가 될까? 그 원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나는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게 바로 데이트라고 생각한다. 어째서 우리나라의 데이트는 이 모양 이 꼴이 된 걸까? 근사한 레스토랑에 갔다가, 2차로 분위기 좋은 카페나 술집을 간다. 그리고 가볍게 담소를 나누다 시간이 늦으면 상대 집에 데려다준다. 그리고는 이 데이트가 얼마나 완벽했는지 노심초사한다. 음식은 맛있었나? 분위기는 좋았나? 음악이 너무 요란스럽지는 않았나? 이딴 걸 따지고 있으니 데이트가 스트레스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연애가 길어지면 좀 나아질까? 그래도 데이트는 여전히 스트레스다. 3년 정도 연애하면 1주일에 2번 만난다고 쳤을 때 데이트 횟수가 312회에 달한다. 삼면이 바다에 북으로 60만 적군이 자리하고 있는 코딱지만 한 나라에서 312번이나 만나면 해볼 거 다 해봤다고 쳐도 무방하다. 그러면 데이트가 맨날 똑같아진다. 카페-극장-식당-술집, 식당-술집-모텔, 모텔-모텔-모텔. 그러다 모텔비가 아깝다고 느껴지면 헤어지거나 결혼하거나 하겄지. 그렇게 데이트는 노잼이 되는데, 사람들은 그걸 당연하게 여기고 산다.


이것은 데이트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데이트란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단순하게 보자면 교제 중인 두 사람이 만나는 일이다. 그렇다 만나기만 하면 데이트다. 냉장고를 부탁하고 싶은 유명 셰프의 레스토랑에 가든, 김밥천국에 가든. 인스타에서 유명한 카페에서 요즘 핫하다는 달고나 커피를 마시는 것도, 동네 놀이터 그네에 앉아 싸구려 캔커피를 마시는 것도 전부 다 데이트다.


하지만 우리는 왜 싸고, 빠르고, 쉬운 길을 택하지 않는 걸까? 데이트의 표면은 '만남'이지만, 그 속에는 '호감'이라는 요소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확히 말하자면, 데이트의 본질은 상대의 호감을 끌어내는 만남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교제 중이 아니어도 데이트는 할 수 있으니 사전적 정의는 틀렸다고 볼 수도 있다) 문제는 어떻게 호감을 끌어내야 할지 모르니 결국 돈으로 처바르고(솔직히 돈만 많으면 꽤 괜찮은 해결방법이긴 하다) 완벽함만 좇으며 스트레스를 받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데이트에서 호감을 끌어낼 수 있을까? 이를 알려주겠다는 연애 꿀팁부터 설문조사까지 다양한 조언을 봤지만, 제대로 본질을 저격한 내용을 본 적은 없었다. 그런데 의외의 책에서 데이트의 본질을 꿰뚫는 통찰을 읽을 수 있었다. 칩 히스, 댄 히스 형제가 지은 <순간의 힘>이다. 


책에는 미국의 한 고등학교에서 진행하는 '골딩 재판' 이야기가 나온다. 학생들은 윌리엄 골딩의 <파리 대왕>을 읽고 토론을 진행해야 하는데, 이 토론이 재판처럼 이루어진다. 원고는 골딩을 고발한다. 사회적 결함의 근원이 인간 본성의 필연적 결과라는 소설의 메시지가 악의적인 허위진술이라고 고발한다. 반면 변호인은 이러한 원고의 주장이 틀렸으며 골딩의 메시지가 타당하다고 반론해야 한다. 재밌는 것은 이러한 모의재판이 실제 법원에서 이뤄진다는 점이다. 학생들은 교사와 졸업생으로 구성된 배심원단과 방청석을 메운 학부모 앞에서 법복을 입고 재판을 진행한다. 재판에서 승리할지, 패배할지 그 결과도 아무도 모른다. 윌리엄 골딩이 실제로 구속되는 것만 빼면 진짜 재판과 다름없는 셈이다. 


이 재판을 준비한 그레그 저릴스와 수전 베드퍼드는 이렇게 말한다. "학생들이 학창 시절에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은 교실임에도 불구하고 가장 기억에 남는 추억이나 경험은 교실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다. 학생들은 수업이 아니라 프롬 파티, 풋볼 경기, 뮤지컬, 학생회 선거, 수영 대회, 장기 자랑 등을 기억했다." 즉, 학생들은 절정의 순간이 있는 사건을 기억했다. 두 교사는 그들의 수업에 이러한 절정의 순간을 만들고자 했고, 그 결과가 모의재판인 셈이었다. '골딩 재판'이 학교의 연례행사가 된 이후 큰 변화가 찾아왔다. "제가 들은 모든 졸업사에서 '골딩 재판'에 관한 이야기는 단 한 번도 빠진 적이 없습니다. 반면에 프롬 파티 이야기는 한 번도 없었고요."


데이트도 같은 방식으로 작동한다. 뻔한 데이트는 매일 듣는 수업과 다를 게 없다. 상대방에게 아무런 기억도 남기지 못할 것이고, 당연히 조금의 호감도 끌어올리지 못할 것이다. 당신이 기억에 남는 데이트를 만들고 싶다면 '절정의 순간'을 만들어야 한다. 평생 기억에 남는 경험을 선사하는 순간 상대에게 당신은 특별한 사람이 된다. 아니, 특별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관계를 결정하는 것은 경험의 공유이기 때문이다. 소통, 즉 communication이란 말의 어원은 라틴어 communicare다. 이 말은 '공유한다' 또는 '함께 나눈다'는 뜻이다. 경험을 함께 나누는 공동체(community 혹은 commune), 재산을 함께 나누는 공산주의(communism), 함께 공유하는 생각이라는 뜻의 상식(common sense)이라는 말까지 모두 communicare에서 유래하였다. 즉, 소통이란 메시지를 주고받는 것이라기보다는 경험을 함께 공유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어떤 경험을 공유하느냐에 따라 관계가 결정된다. 개 같은 경험을 나누면 개새끼가 되고, 훈훈한 경험을 나누면 훈남이 된다. 당연히 특별한 경험을 나눈 사람은 특별한 관계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럼 특별한 경험은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일단, 그걸 이 글에서 찾는 건 너무 날로 먹으려는 심보다. 최소한 맘에 드는 사람을 위해 30분이라도 고민해보자. 아니면 앞서 언급한 <순간의 힘>이라도 읽어보자. 고민하고 쥐어짜면 뭐라도 나오는 법이다. 또한 내가 알려주고 싶어도 알려주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사람이라는 맥락은 천차만별이다. 70억 인류가 있다면 70억 맥락이 존재하는 셈이다. 그 맥락에 따라 다른 전략을 세워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그래서 데이트 꿀팁이라는 것들이 도움이 안 되는 경우가 많다. 중요한 것은 본질을 파악하는 것이다. 본질을 알면 다양한 맥락에 맞게 적절히 적용할 수 있다. 


그래도 이렇게만 던지고 가자니 양심에 찔려, 뭐라도 도움이 되는 팁을 알려주고자 한다. 하지만 구체적이라기보다는 포괄적인 내용의 팁이다. 즉, 본인의 상황에 맞게 잘 적용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걸 잊지 말자.


0) 밥부터 먹어라


배고프면 특별한 경험이고 나발이고 아무것도 통하지 않는다. 나처럼 유난히 공복에 예민한 사람은 더 그렇다. 나는 20만 원짜리 뮤지컬 보다가 배고파서 쉬는 시간에 만쥬 사 먹은 적도 있다. (냄새 강력크) 그러니 밥부터 먹어라. 배부터 채워라. 이건 0번이다. 


1) 사진 찍고 싶은 경험을 만들어라


정말로 특별한 경험을 만들었는지 확인할 방법이 있다. 상대방이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찍으면 성공이다. 지금 이 경험이 사진으로 남기고 싶은 만큼 특별하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이걸 역으로 이용해보자. 사진 찍기 좋은 순간을 만드는 것이다. 괜히 분위기 좋은 식당, 유명한 카페를 찾아다니는 게 아니다. 그런 곳은 사진으로 남길 게 많다. 뭐, 사진으로 남긴다고 반드시 특별한 순간이 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사진조차 남기지 않는 것보다는 낫다. 


데이트 장소를 알아보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진행해야 한다. 그냥 좋은 곳, 남들이 추천하는 곳만 찾으면 음식 맛에서 조명 밝기까지 별의별 게 다 신경 쓰이고 완벽하지 않으면 성에 안 차기 마련이다. 하지만 특별한 경험이라는 목적을 가지면 데이트 코스의 범위가 상당히 넓어진다. 그것은 맛있는 음식이 될 수도 있고, 예쁜 인테리어일 수도 있고, 섹시함 종업원일 수도... 이건 아니구나, 아무튼 뭐든 될 수 있다. 예를 들면 종로 뒷골목 허름한 고깃집도 맛만 좋으면 사진으로 남기고 싶어지는 법이다. 그러니 사진으로 남기는 경험을 생각하며 데이트를 기획해보자.


2) 잘 모르겠으면 돈을 처발라라


내가 금수저다. 차가 포르셰다. 돈이 썩어난다. 그러면 고민하지 말자. 돈으로 처바르면 된다. 지난주에는 에메랄드빛 바닷속에서 스쿠버 다이빙하고, 이번 주에는 유럽 고성에 놀러 가고. 이러고 살면 모든 데이트가 특별한 경험이 된다. 그게 되는 분은 그러고 사시면 된다. 우리는 그게 안 되니까 짱구를 굴려야 한다. 


매번 호화로운 데이트를 할 수는 없겠지만, 1년에 한두 번은 이런 기회를 마련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아껴 쓰고 모아두었다가 이럴 때 쓰자. 뭐 상대방만 노는 것도 아니고 본인도 호화로운 경험을 할 테니 아까움도 반으로 줄어들 것이다. 


3) 가끔 시나리오를 깨부숴라


모든 데이트는 시간이 지나면 뻔한 시나리오로 흘러가게 되어 있다. 어쩔 수 없다. 우리 삶이 무한도전도 아니고 매번 새로운 걸 선보이기는 너무 힘들다. 하지만 가끔은 의외의 재미를 선사하는 게 좋다. 나는 가끔 아무 거리 챌린지를 하는데, 의외의 장소에서 분위기 좋은 카페나 식당을 찾기도 한다. 편하게 입고 만난 날이면 뜬금없이 택시 타고 유명 산책로로 가기도 한다. (서울에는 분위기 좋은 산책로가 많다) 아니면 예상치 못한 순간에 만나는 방법도 있다. 가끔 퇴근 시간에 회사 앞에서 꽃 들고 기다려주면 그렇게 좋아하더라. 뭐가 됐든 의외의 순간을 만들어라. 지루함이 사라질 것이다.


4) 특별함으로 포장하라


다른 말로 하자면 그럴듯한 스토리를 부여해야 한다. 평범한 것도 스토리가 달라붙으면 특별한 것이 된다. 예를 들면 어느 동네 언덕에 벤치 몇 개가 전부인 아담한 공원이 있다고 해보자. 그냥 아무 의미 없는 평범한 공간일 뿐이다. 그런데 이 공간에 스토리를 끼얹어 보자. "내가 이 언덕에서 도시를 바라보면서 건축가의 꿈을 키웠어. 저기 보이는 건물은 가장 최근에 지어진 빌딩이고, 그 건너에 있는 건 우리 동네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야. 저 건너편에는 청계천 고가도로 흔적이 남아있고..." 그러면 그 공간은 특별한 공간이 된다. (무슨 영화에서 따왔는지 맞히면 인정) 


진정성 있는 스토리가 있다면 좋겠지만, 인생이 아무리 다이내믹해도 우려먹는 데 한계가 있다. 그래서 진정성만큼 포장도 중요하다. 별것 아닌 것도 별것처럼 포장해서 전달해야 한다. 한 마디로 약을 잘 팔아야 한다. 이러면 능글맞다느니 허풍이라느니 하는 말을 듣지만, 그런 놈들이 이성을 잘 꼬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그래서 썰을 잘 푸는 사람이 연애하기가 좋다. 평범한 카페도 특별한 카페가 되고, 극장처럼 뻔한 데이트 코스도 흥미진진한 경험으로 바뀐다. 이런 썰 푸는 능력은 어떻게 기를 수 있을까? 공부와 덕력이 전부다. 강형욱하고 애견 카페 가거나, 이동진하고 극장에 간다고 생각해보자. 그날은 그냥 인생날이 되는 거다. 그러니 당신이 좋아하는 분야에서 썰을 풀 수 있을 정도로 덕력을 쌓아보자. 최소한 데이트에서 할 말이 없다고 고민할 일은 없을 것이다. 


5) 데이트할 사람이 없어요


이런 푸념 하면서 핸드폰에 틴더도 안 깔려 있으면 진짜 벽보고 반성해야 한다. 노루가 사냥꾼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 같이, 새가 그물치는 자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 같이 절박하게 달려들어라. 그리고 조건 따지면서 만날 사람 없다는 소리도 하지 말자. 그냥 아무나 만나서 데이트라도 해라. 뭐든 경험이 최고의 스승이다. 데이트 한다고 반드시 사귀는 것도 아닌데 부담가질 필요도 없다. 많이 만나고 많이 차이자. 


하지만 남중-남고-공대-군대-지방공장 테크트리를 타서 정말 주변에 데이트할 사람이 없는 경우라면... ㅠㅠ 그저 애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