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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쌤 윤PD

[리뷰]<보이후드> - 나는 아직도 ‘보이후드’에 갇혀있다

  2014년이 떠나기 전에 올해 보지 못해서 아쉬웠던 영화들을 몰아보고 있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는 소문대로 정말 재미있었고, <노아>는 대런의 이름값에 비해선 좀 아쉬웠다. 그리고 오늘 <보이후드>를 보았다. 이미 철 지난 작품이지만, 그럼에도 이 작품에 대해서는 글을 쓰고 싶었다. 

  <보이후드>는 한 소년(엘라 콜트레인, 메이슨 주니어)의 6세부터 대학 입학 때까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비록 엄마(패트리샤 아퀘트)가 3번의 이혼을 겪었고, 빈번하게 이사를 다녀야 했지만, 평범하다면 평범한 성장기를 보여준다. 주인공 메이슨은 불의에 저항하는 영웅도 아니고, 삶의 진리를 깨닫는 현자도 아니며, 심각한 정서장애가 있다거나, 살인 충동을 억제하지 못하는 사이코패스도 아니다. 그는 너무도 평범한 우리의 친구이며, 아들이자, 우리 자신의 모습이다. 그가 겪었던 삶도 마찬가지다. 부모에게 학대를 당하지도 않았고,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지도 않았다. 숙제를 잘 안하기도 하고, 시비 거는 아이들도 있었고, 조금은 껄렁한 형들과 놀기도 했지만 그는 평범하게 자랐다. 사춘기 때는 중2병에 걸리기도 했고, 고등학교 졸업 때는 여자 친구에게 차이기도 했다. 이런 시련 속에서도 그는 묵묵히 자란다. 아이들은 원래 그렇게 자라는 법 아닌가? 나도 그렇게 자랐으니 말이다. 이렇듯 영화는 너무나 평범한 소년의 너무도 평범한 성장을 담담하게 그려낸다. 그리고 그 담담함이 너무나 따뜻하게 다가온다. 그저 평범한 성장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메이슨의 삶을 아끼는 마음이 솟는다. 그리고 이것은 다시 나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 되새기게 한다. 너무나 소중하고 특별한, 그렇기에 아끼고 사랑하게 되는 필부의 삶. 그것이 바로 <보이후드>다. 

  간간히 보이는 시대의 모습을 찾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 메이슨이 6살 때, 누나 사만다(로렐라이 링클레이터)는 브리트니 스피어스의 ‘Oops, I did it again’을 부르며 메이슨을 약 올린다. 10살 때는 『해리포터와 혼혈왕자』에 열광하고, 11살에는 로저 클레멘스(메이저리그 투수)가 불혹을 넘긴 나이에 현역으로 뛰는 모습을 지켜본다. 15살 때 사만다는 아이폰으로 레이디 가가의 뮤직비디오를 본다. 비록 나와는 10년의 터울이 있지만, 그의 성장 속에서 나는 추억을 찾을 수 있었다.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를 볼 때 느꼈던 아련하고 훈훈한 감성이다. 추억팔이라는 것을 알지만, 웃으며 만끽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이러한 장면들은 자칫 심심할 수 있을 법한 영화를 산들바람처럼 조심스럽게 환기시킨다. 더불어 시대를 공유하는 관객에게 큰 동질감을 주어 주인공의 삶에 더욱 애착을 갖도록 만든다. 돌이켜보면 12년의 시간동안 시시각각 변해오는 세월의 파편들을 필름에 담아 둔 감독의 역량이 참 대단하다고 생각된다.

  서론이 길었다. 나는 이 영화에서 상당히 개인적인 감흥을 받았다. 그래서 그 이야기를 풀기 전에 보편적인 이야기를 하려 했다. 지금부터의 감상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공감하지 못할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그래도 이 글을 쓰려 한다. 이것은 영화를 보는 색다른 시각이라거나 참신한 비평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나의 한심함에 대한 고백이며, 갚을 수 없는 은혜에 대한 감사의 글이다.





  엄마라는 이름의 저주

  메이슨의 엄마는 자식들에 대한 책임감이 투철하다. 아이들을 돌보기 위해 사귀는 남자와의 데이트마저 포기한다. 한심한 남자친구는 이를 두고 그녀에게 화를 내며 “왜 내가 네 인생의 실수를 책임져야 해?”라고 쏘아댄다. 엄마는 이 순간에도 자신을 항변하기보다 자신의 아이들을 실수라고 하지 말라며 아이들을 챙긴다. 이 광경을 지켜보는 메이슨에게 이는 얼마나 가슴 든든한 모습이었을까? 하지만 그녀의 인생은 어디 있는가. 영화도 보고 싶고, 클럽도 가고 싶은 아직 젊은 그녀이지만, 아이들을 위해 이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현실이다.

  그녀는 아이들을 위해 일과 공부를 병행한다. 자신을 발전시키지 못하면 아이들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학위를 따려 노력한다. 어린 메이슨에게 이런 엄마의 모습은 어쩌면 당연하게 보였을지도 모른다. 엄마는 일도 하고, 공부도 하는 사람인거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그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학사경고 2회 누적 후 군대에 다녀온 나에게 졸업은 정말 피말리는 싸움이었다. 머리는 굳었고, 몸은 예전 같지 않았다. 시험 때마다 낙제를 걱정하며 불안 속에서 살아야 했다. 아이러니 한 점은 F가 나올까봐 조마조마 했던 과목은 A-가 나오고 B+이상을 확신했던 과목은 C-가 나왔다. 이러니 복학 후 졸업 때까지 시험 볼 때마다 부들부들 할 수밖에 없었다.(점수가 예측 불가인 이유는, 상대평가라 A가 최대 30%까지 가능했음에도 교수님들이 5~30%까지 임의대로 배정하셨기 때문이다. 심지어 상대평가 무시하고 점수로 잘라서 학점을 주시는 분도 있었는데, 신기한 것은 어떤 점수대도 30%를 넘지 않았다. 흠좀무...) 20대 후반에도 10대 후반보다 몸이 쳐지는 느낌을 갖는데, 30대를 넘긴 메이슨의 엄마는, 심지어 2명의 아이를 낳은 몸으로, 일과 학업을 병행했다. 영화에서 이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보여주지 않은 것은 솔직히 불만이다. 하지만 엄마가 메이슨에게 그런 모습을 보여주지는 않았을 것 같다.

  그렇게 당연하게 엄마는 언제나 바쁜 사람이 되었다. 직장이 안정되었을 때도, 그녀는 이혼을 겪고, 파산을 걱정하며 살아야 했다. 그녀의 삶은 고난과 슬픔으로 점철되어 있지만, 그것은 엄마니깐 당연한 일처럼 보인다. 나는 이 점이 너무나 안쓰러웠다. 하지만 이 안쓰러움도 싸구려 동정심에 지나지 않는 점을 이 글을 쓰면서 확인하게 되었다. 난 엄마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다. 국내 포털사이트의 영화 DB에서 조차 그녀의 역할은 ‘엄마’다. 그녀의 이름을 잊었다는 것은 나에게 큰 충격이었다. 마치 <조제, 호랑이, 물고기들>에서 조제가 장애인이란 것을 보여주는 마지막 컷의 ‘털썩’하는 소리를 들었을 때 같았다. 그녀의 이름은 올리비아다. 하지만 올리비아는 없고, 엄마만 남았다. 엄마라는 것은 어쩌면 저주일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존재를 갉아먹는 저주 말이다.


▲ 그녀는 엄마이기 이전에 올리비아 였다.






  나를 꽃피우기 위해 거름이 되어버렸던...

  영화 말미 메이슨은 아빠(에단 호크, 메이슨 시니어)가 올리비아와 헤어지지 않았다면 자신이 주정뱅이 새 아빠를 만나지 않았어도 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한다. 그들은 술에 빠져 메이슨의 마음속에 깊은 주름을 새겨 놓았다. 하지만 이것은 올리비아가 원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안정된 가정을 원했고, 그 남자들은 충분히 매력적이고 훌륭해 보였다. 그런 것을 바라지 않았는데, 인생은 그렇게 슬프게 흘러갔다. 메이슨이 심각하게 원망한 것은 아니었다. 작은 투정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조금은 야속하게 느껴졌다.

  그녀의 인생은 언제나 원하던 대로, 계획한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두 번의 이혼을 하고, 집을 팔아야 했다. 그녀는 치열하게 살아왔지만 메이슨마저 떠나고 나니 그녀에게 남은 것은 죽음뿐이었다. 메이슨은 그런 올리비아에게 40년이나 후에 있을 일을 앞당겨 걱정한다고 핀잔을 준다. 멍청한 놈. 가서 그냥 안아드렸으면 될 것을... 난 올리비아의 이 대사가 남 얘기 같지가 않았다. 요즘 우리 엄마도 비슷한 말씀을 하시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죽을 날 말고는 기다릴 게 없다.”
아직 환갑도 안 되신 엄마가 이런 말씀을 하시면 나도 핀잔을 준다. 아직 죽으려면 한참 남았다고. 그런데 생각해보니 이런 생각을 하는 엄마의 마음이 너무 슬프게 다가온다. 자식새끼 키우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치고, 이제 다 자란 자식이 품을 떠날 때 엄마에게 남을 것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맨몸으로 왔다가 맨몸으로 가는 것이 인생이라고도 하지만, 나를 위해 엄마로서 살아온 그녀에게 그런 비참함을 주고 싶지는 않다.

  그나마 내가 부모님 품에서 떳떳하게 독립했다면 모르겠다. 나이가 서른이 넘었음에도 아직 취업을 못하고 있다. 부모님은 나를 좋은 대학에 보내기 위해 고생하시고, 그 대학을 졸업하도록 학비까지 대주셨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인생을 거름으로 썼으면서도 꽃 한 송이 피우지 못했다. 나름 방도를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하루하루 백수로 인생을 좀 먹고 있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나의 이러한 실패가 엄마에게는 상실감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자식사랑이 때로는 과하기도 한 우리나라에서 자식의 성공 정도면 올리비아가 느꼈을 상실감을 상쇄시켰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도 나는 엄마의 인생을 하루하루 무의미하게 만들고 있을 뿐이다.

▲ 올리비아의 마지막 대사가 끝나고, 이 노래가 떠올랐다.







  시간은 영원하지 않다

  “시간은 영원하지만 순간은 바로 지금이기에 (소중하다.)”
  메이슨의 이 마지막 대사에 나는 아니라고 외치고 싶었다. 시간은 영원하지 않다. 젊은 메이슨에게 시간은 영원할 것 같겠지만, 올리비아의 시간은 앞으로 겨우 20~30년 남았을 뿐이다. 그리고 우리 엄마는 더 짧다... 시간은 영원하기에 순간이 소중한 것이 아니다. 시간은 유한하고 그렇기에 소중한 순간만이 영원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러한 영원을 선사해줄 수 있는 시간도 유한하다.

  시간이 너무 무섭다. 하루하루, 일분일초 착실하게 그 끝을 향해 흘러간다. 언제부턴가 성공하면 잘해주겠다는 형편없는 변명이 입에 붙어버렸다. 하지만 어디가 성공인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성공해야할지도 모르겠다. 그저 사람구실 하는 것이 목표인 형편이다 보니 나야말로 엄마에게 돌려줄 것이 아무 것도 없다. 그저 사랑한다는 말 밖에 드릴 것이 없다. 이마저도 난 부끄러워서 못할 것 같지만...





※ 한 가지 재밌는 일화를 쓰자면, 영화는 로저 클레멘스를 전설로 그려내고자 했던 것 같은데, 문제는 2007년 발표된 「미첼 리포트」로 인해 로저 클레멘스가 약쟁이 전설이 되어버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