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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휴지통

[단편] 비결

  사랑에도 갑을이 존재한다. 더 좋아하는 쪽이 을이다. 당연하게도.





  그녀를 처음 만난 건 대학 2학년 때였다. 신입생으로 들어온 그녀는 내가 감히 말을 걸기도 어려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녀의 존재감은 실로 대단했다. 가뜩이나 남자만 득시글한 학내에서 그녀는 자연스럽게 여왕이 되었다. 남학생들은 벌떼처럼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누구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가장 처참하게 차인 건 신입생 대표였다. 그는 5월 대동제 때 그녀에게 공개 고백을 했다. 전교생이 보는 노천극장에서 커다란 목소리로 "사랑합니다. 제 마음을 받아주세요."라고 소리쳤다. 그녀는 받아주려는 듯 침착한 걸음걸이로 무대에 올랐다. 그러나 "마음은 고맙지만, 받아들일 수 없어요."라며 교과서 같은 대답으로 거절하고 다시 침착한 걸음걸이로 무대를 내려왔다. 신입생 대표 녀석 다음날 바로 자퇴했다던가? 꽤 똑똑해 보이는 녀석이었는데... 그런 식으로 그녀는 첫 학기 동안 모두의 고백을 거절했다. 하지만 태풍의 눈이 고요하다 한들 주변까지 얌전할 순 없는 법이다. 그녀 때문에 학교 분위기는 말 그대로 초토화되었다.

  그렇게 1학기가 지나고 2학기가 시작되었다. 그녀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건만, 어느새 썅년이 되어있었다. 남학생들은 꼬리 칠 땐 언제고 나중에 딴소리 한다며 흉을 봤다. 얼마 없는 여학생들은 이쁜 것들이 싸가지가 없다며 흉을 봤다. 그녀는 고백을 거절했을 뿐인데... 결국 그때까지 고백하지 않았던 나만 그녀 곁에 남을 수 있었다. 소심했던 나는 그녀에게 끝내 고백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연모하는 마음마저 없던 것은 아니었다. 나는 묵묵하게 그녀에게 호의를 베풀었다. 언젠가 그녀가 알아줄 거라 믿으면서.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랬을까 싶지만, 그때는 힘들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그리고 그 날이 왔다. 그녀의 그룹 과제 발표날이었다. 그녀는 만인의 적이었고, 팀원들은 그녀에게 조금도 협조하지 않았다. 오직 나만이 그녀의 과제를 보이지 않는 곳에서 도왔을 뿐이었다. 그런데 팀원들이 마냥 손을 놓고 있던 게 아니었다. 그녀 모르게 자기들끼리 따로 발표를 준비했다. 그녀가 강의실에 왔을 때 (그녀는 부지런한 성격으로 늘 강의 10분 전에 강의실에 도착한다) 팀원들은 이미 발표 준비를 마치고 교수님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기억하기로 그녀의 발표 순서는 세 번째였다. 그들은 발표 순서까지 바꿔가며 그녀를 물 먹인 셈이었다. 발표 순서를 바꿔준 다른 녀석들도 마찬가지였다. 강의실 전체가 그녀를 왕따시키고 있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 표정도 짓지 않고, 몸을 휙 돌려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나는 그녀를 뒤쫓아갔고, 우리는 그날 술을 진탕 마셨다. 그 와중에도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허둥댔다.
  "지금 날 보면 무슨 말을 해주고 싶어?"
  나는 그녀가 울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무언가 화제를 돌리고 싶었다.
  "그... 글쎄. 혹시 너도 엘프의 선조가 트롤이라고 생각하니?"
  말을 뱉고 나서 아차 싶었다. 아무리 화제를 돌린다고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릴 하다니... 지금 생각하면 나는 정말 등신이었다. 내가 눈치 없이 흰소리나 해대자 그녀는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하하하하."
  고개를 숙이고 끅끅대며 웃던 그녀는 그 자세 그대로 멈춘 채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 너무 힘들어. 난 그냥 공부하고 싶었을 뿐인데. 연애는 관심 없는데."
  "그런데 연애 안 하기가 이렇게나 힘들구나..."
  "..."
  한동안 말이 없던 그녀는 내 멱살을 끌어당기더니 나에게 키스했다.





  그녀가 나와 사귀기로 했다는 이야기가 돌자 그녀의 평판은 눈에 띄게 나아졌다. 다만, 딱히 좋아졌다기보다는 이상해졌다고나 할까? 취향이 독특하다는 둥, 4차원이라는 둥. 그녀는 별종이 되어버렸다. 그래도 썅년보다는 나았다.

  연애 초기에는 마냥 행복했다. 그동안 묵묵히 그녀를 지켜온 보답을 받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 관계는 어딘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녀를 위해 모든 것을 퍼주었다. 데이트 비용은 물론이고, 그녀의 수업 장비까지 내 돈으로 사주었다. 하지만 퍼주는 게 불만은 아니었다. 난 그렇게 퍼주는 게 좋았으니깐. 불만은 그녀가 관계를 허락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녀는 혼전 순결을 지키고 싶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믿었고, 그 신념을 지켜주고 싶었다.





  그 신념이 구차한 변명에 불과하다는 걸 깨닫는 데는 1년의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다음 해 새 학기가 열렸을 때 그놈이 나타났다. 키도 크고, 이목구비도 뚜렷하고, 금발 머리가 잘 어울리는 하얀 피부가 매력적이었다. 그놈은 단숨에 학내의 관심을 모았다. 외향적이고 자신감 넘치는 모습은 남녀를 가리지 않고 그놈에게 호감을 품도록 만들었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도 마찬가지라는 걸 신경 썼어야 했다.

  주말 동안 고향 집에 다녀오기로 했다. 그녀는 나 없는 동안 심심해서 어쩌냐고 투정을 부렸고, 나는 그녀의 이마에 입 맞추고 고향으로 가는 비행선에 몸을 실었다. 그런데 도착한 집에 아무도 없었다. 부모님은 건넛마을 결혼식에 다녀온다는 쪽지만 남겨 놓으셨다. 나는 툴툴거리며 어머니가 싸 놓은 음식만 챙겨서 바로 상경했다. 돌아오는 길은 기분이 좋았다. 얼른 가서 그녀와 주말을 보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짐을 자취방에 던져 놓고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이미 해는 져서 하늘에 푸르스름한 자취만 남겨놓고 있었다. 빨리 가야 한다는 생각에 나는 아예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의 자췻집 대문이 보이는 먼발치에서 그만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놈과 그녀가 그녀의 집으로 함께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잔뜩 취해 보이는 그녀는 그놈의 목에 매달려 앙탈을 부리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더는 볼 수 없어 그 자리에서 도망치고 말았다. 도망치는 길목에서 봄바람에 흩날리는 벚꽃이 달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이 너무나 찬란하고 아름다워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사랑은 더 하면 안 된다. 항상 덜 해야 한다. 덜 사랑하는 자는 더 사랑할 대상이 생기면 언제든지 떠날 수 있다. 나는 이 교훈을 남들보다 일찍 깨달았을 뿐이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다짐했다. 다시는 누구도 더 사랑하지 않을 거라고. 아예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내가 먼저 고백하고, 내가 먼저 사랑하고, 내가 더 사랑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그렇게 다짐했다.

  그렇게 누군가 나를 더 사랑해주길 기다리다가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아무도 나에게 먼저 고백하는 사람이 없더라. 이게 내가 대마법사가 된 비결이다.





  - 최초의 10서클 대마법사 키린 토(102세)와의 인터뷰 中





  *키린 토는 인터뷰가 나가자 "술자리에서 농담 삼아 한 이야기를 사실로 와전시키면 곤란하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는 또한 "정식 인터뷰도 아니었으면서 기사로 싣는 것은 명예훼손이다."라며 기자의 사과를 요구했다.

  *기사가 나간 후 키린 토가 고자 혹은 게이라던 뜬 소문이 모두 사라졌다.

  *"평범한 인생 vs 대마법사+고자되기" 설문조사 결과 평범한 인생을 선택한 사람이 99.9%였다. 단 한 명만 후자를 골랐는데 그게 키린 토라는 소문이 있다.
























 [모난 조각] 13주차 주제 "오마주"를 바탕으로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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