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원동 아트시네마 이관행사 오픈토크에서 나온 정성일 평론가의 발언이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저는 비평가라는 이름을 단 사람이 영화를 보자마자 즉각 나와서 자기 트위터에다 본 영화평을 올리는 건 자판기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무슨 비평가입니까? 자기가 감히 영화를 보자마자 비평을 쓸 수 있다고?”
이에 듀나가 반박하는 트윗을 올렸습니다.
(참조)
이 글은 정성일과 듀나의 논쟁을 바라보며 어떤 비평을 추구하고, 어떤 글을 써야 하는가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하는 글입니다.
트위터는 비평이 될 수 있을까?
저는 트위터라는 미디어와 140자라는 길이에 대해서는 일단 듀나의 입장에 동의합니다. 애초에 리뷰와 비평은 구분되어 내려왔으니까요. 다만 저는 여기서 더 나아가 트위터가 비평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위에 링크한 PPSS의 주장처럼 '좋은 글은 어떤 곳에서 어떤 형태로 있든 좋습니다.' 그것이 140자의 제한에 걸려있다 해서 좋은 글이 될 수 없는 것은 아니지요.
하지만 글자 수가 제한되는 만큼 담을 수 없는 것들도 있습니다. 영화를 해부하는 수준의 분석은 트위터로는 불가능합니다. 이론의 적용에 대한 고찰도 불가능합니다. 트위터는 잘 압축한 해석을 개진하는 것 정도만 가능하겠지요. 그래도 다른 해석들에 오염되기 전에 자신만의 해석을 개진할 수 있는 장점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비평은 무엇을 보여주기 위해 쓰여지는 걸까요? 분석일까요? 해석일까요?
분석 그리고 해석
분석은 비평에 있어 소화작용이라고 생각합니다. 작품을 신 바이 신, 컷 바이 컷으로 잘게 부수어 나가며 거시적인 부분부터 숨어있는 상징까지 작품을 온전히 이해하는 작업입니다. 물론 여기서 그치지 않고 되새김질을 통해 다시 끊어낸 컷을 이어 붙여 또 다른 의미를 찾아낼 수도 있죠. 이런 과정은 작품을 '이해했다'고 말할 수 있는 자격을 부과하는, 어찌보면 남의 작품을 까내리는 사람이 갖추어야 할 도덕적 소양 같은 것일지도 모릅니다.
해석은 소화한 것을 배설한 똥입니다. 당연히 좋은 똥이 나오려면 좋은 소화작용이 뒷받침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이 똥이 좋은 똥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기준으로 소화과정을 살펴보기도 하죠. 이렇게만 생각한다면 분석과 해석은 인과적 관계로 보여집니다.
하지만 현실은 해석이 분석에 선행합니다. 분석을 하고 그에 따라 해석을 내놓는 것이 아니라 해석을 하고 거기에 맞는 분석을 찾는 식이죠. 자연과학이나 사회과학이라면 주어진 데이터를 분석해서 경향을 해석할테지만, 비평은 자신이 느낀 바를 지지할 수 있는 근거를 찾기 위해 분석을 합니다. 만약 비평이 그 순서를 반대로 잡아 분석이 선행된다면? 이놈이나 저놈이나 똑같은 비평을 하고 있을겁니다. 어떤 평론가는 '비평이란 헛소리를 얼마나 그럴듯하게 표현하는 것이 관건이다.'라고 말하기도 했죠.
트위터는 초록(抄錄)이다
위에서 물었던 '비평은 무엇을 보여주기 위해 쓰여지는가?'에 대한 대답은 당연히 해석입니다. 작품을 통해 어떤 해석을 끌어냈느냐가 바로 비평의 핵심입니다. (예를 들면 <괴물>을 통해 한국사회의 부조리를 읽어내는 것이 비평인 셈이죠.) 그런면에서 트위터는 비평의 핵심만을 뽑아낸 글로 봐도 무방할 겁니다. 더구나 영화를 보고난 후 감흥이 가시기 전에 쓰는 생생한 해석이죠.
하지만 140자로 그친다면 좋은 비평으로 나아갈 수는 없을 겁니다. 그 해석을 뒷받침하는 치밀한 분석이 담겨있는 글이 되어야만 비평으로서 완성될 수 있을겁니다. 그러니 트위터는 트위터대로 장문의 글은 장문의 글대로 모두 가치가 있는 것이죠. (그런 면에서 듀나는 트위터도 하지만 꾸준히 글을 쓰기에 정성일의 비판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봐야 할 겁니다.) 트위터는 논문의 초록(抄錄)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해석이라는 비평의 액기스를 가장 생생한 상태로 남기는 것이죠. 그 초록이 마음에 든다면 독자들은 그 뒤의 분석과 참조문을 찾아보는 노력을 기꺼이 할 겁니다. (솔직히 트위터만으로 완전한 비평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독자는 없을 겁니다) 단, 평론가라면 그 초록 뒤에 충실한 본문을 갖고 있어야 겠죠.
좋은 비평이란 무엇인지 고민해봅니다
저는 글의 길이가 담론의 깊이와 탁월한 감식안을 보장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정성일 평론가도 고작 글의 길이라는 단순한 맥락에서 지적하신 바는 아니겠지요. 그냥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좋은 글은 어떤 곳에서 어떤 형태로 있든 좋습니다. 이용철 평론가는 위에서 말한 시네토크에서 “긴 글을 써봤자 아무런 반응이 없다.”고 투정(?)을 부렸지만 그건 긴 글이기 때문이 아니라 별로 좋은 글이 아니기 때문일 겁니다.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흥미를 줄 수 있는 탁월하고 신선한 관점이 거기 있다면 트위터에서든, 커뮤니티에서든, 블로그에서든 화제가 될 겁니다. 같은 신 전영객잔이라도 김영진 평론가의 글이 항상 그냥저냥 넘어가는 반면, 허문영 평론가의 글은 언제나 일정한 정도의 반향과 담론을 이끌어내는 것처럼요. (참조)
처음에는 글을 쓸 때는 욕 먹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한 관심사였습니다. 조롱당하고 손가락질 받지 않도록 정신 바짝차리고 글을 쓰고자 했죠. 그런데 막상 비난을 받아보니 글 내용을 비난하는 경우도 없고, 설령 비난을 한다 해도 딱히 타당한 논리를 갖고 비난하는 경우도 없더라고요. 어쩌면 인터넷의 한계일 수도 있겠지만 (엄청난 고수나 프로에게 개털리는 날이 올 수도 있겠죠.) 요즘에는 욕 먹는 것은 별로 개의치 않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글을 한 편, 두 편 쓰다보니 점점 더 잘 쓰고 싶어집니다. 더 깔끔하고, 더 인상적이고, 더 아름답게! 제가 고상한 척 하는 비평을 싫어하지만 글의 품격은 고상하게 쓰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영화 감상을 쓸 때면 정말 많이 고민하고, 퇴고를 반복했습니다. 그런데 반응은 점점 시들해져가더군요. 이 말은 제 글이 점점 식상해진다는 뜻이기도 했습니다. 무엇이 문제일까? 어떻게 하면 더 좋은 글을 쓸 수 있을까? 고민은 많았지만 답이 보이진 않았습니다. 그러다 오늘 저 문구를 보니 문득 어떤 생각이 듭니다. 저는 욕을 먹지 않기 위한 글을 점점 더 잘 쓰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흠집없는 글을 쓰려고 했던 게 아닌가 하고요. 그런 만큼 글이 평가하고 통보하는 듯한 느낌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예전부터 평론가는 관객과 제작하는 사람들을 이어주는 마담뚜 같은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 두 평론가의 논쟁과 이를 다룬 글을 보며 그 마담뚜가 되기 위해 어떤 모습이 되어야 하는지 어떤 윤곽을 잡아낸 듯한 기분이 듭니다. 독자와 소통한다는 것은 트위터라는 쌍방향 미디어나 커뮤니티 같은 공개된 곳에 올린다고 이뤄지는 것이 아닐 겁니다. 진정한 소통은 나의 글이 독자의 마음에 반향을 일으키고, 그것이 다시 댓글등으로 저에게 돌아와 저의 시각을 더 깊고 넓게 키워주는 일일겁니다. 이것은 미디어의 종류와는 상관 없습니다. 그런 힘을 가진 글이라면 하다 못해 화장실 낙서로 쓰여있다 하더라도 소통은 이뤄질겁니다.
페이스북에는 '리뷰왕 김리뷰'라는 리뷰어가 있습니다. 이 사람의 글은 평론으로 볼 수 있을까요? 확실히 평론으로 보기에는 분석의 부재와 깊이의 상실이 걸림돌이 될 겁니다. 하지만 극도로 주관적이라는 그의 포지션과 독자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멘트는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평론가들이 독자의 마음을 울리지 못하는 와중에 '김리뷰'같은 효자손이 그나마 가려운 독자의 마음을 긁어주는 것이 지금 대한민국 비평의 현 주소가 아닐까 싶습니다.
아직 비평다운 비평을 쓸 실력도 안 되면서 좋은 비평을 고민하는 것이 좀 우습긴 하지만, 그래도 고민해봅니다. 앞으로의 글은 사람들의 반향과 담론을 끌어내는 그런 글을 쓸 수 있도록 노력하고자 합니다.
오늘도 이렇게 부서지는 멘탈을 부여잡아 봅니다.
'하... 난 도대체 뭘 쓰고 있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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