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천(歸天)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천상병 시인은 기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젊은 시절 머리가 덥수룩하여 얼굴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폐인 꼴을 하고 다녔고, 이를 딱하게 여긴 친구가 이발을 시켜주기로 합니다. 하지만 그냥 돈을 주면 술을 사 먹을까 봐 천상병을 데리고 이발소로 가게 되죠. 그런데 친구가 이발비를 지불하고 나서자 천상병은 지금까지 이발한 비용을 제외하고 환불받기를 요구합니다. 어이없어하는 이발사가 환불을 해주자 천상병은 그 돈으로 술을 사 먹었다고 합니다. 천상병은 무연고자로 오해받아 서울시립정신병원에 수감되기도 했습니다. 당시 그의 지인들이 그가 객사한 것으로 생각하여 그가 남긴 시를 모아 유고시집을 내기도 했었죠.
저의 고등학교 시절 시인이자 국어 선생님이었던 은사께서는 귀천에 대해 수업하며 천상병에 대한 일화를 말씀하셨습니다. 천상병은 주변 지인을 만나면 500원 1000원씩 세금이라는 명목으로 푼돈을 뺏어다 술을 사드셨다고 합니다. 너무나 자유분방하고 얽매인 것이 없어 보이는 것이 마치 시 「귀천」같은 사람이었다고 말씀하셨죠.
하지만 천상병 자신도, 그의 시 「귀천」도 마냥 낙천적인 것만은 아니라고 합니다. 천상병은 1966년 독일 동(東)베를린 공작단 사건, 일명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어 6개월간 옥고를 치른 후 석방되었습니다. 당시에 모진 고문을 받았는데 특히 전기 고문을 당한 후유증으로 아이를 가질 수 없게 되었고, 이뿐만 아니라 돌아가실 때까지 고문 후유증으로 몹시 고통받으셨다고 합니다. 그런 고통을 겪었던 천상병에게 세상은 정말 소풍처럼 아름답기만 했을까요? 그렇기에 「귀천」의 마지막 구절에 적힌 말줄임표가 의미심장하게 다가옵니다. 그 말줄임표에는 세상이 아름다웠다고 말할 수 없는 천상병의 목메는 심정이 담겨있는 것이죠.
그렇다면 「귀천」은 낙천적인 시가 아니라 염세적인 시일까요? 저는 저 말줄임표가 있음에도 「귀천」도 천상병도 낙천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비록 목메는 아픔을 끌어안고 있더라도 세상은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기에 그저 말줄임표로 대신한 것이죠. 그렇다면 저 말줄임표는 단순한 반어적 표현을 넘어서게 됩니다. 진정으로 인생을 초탈한 시인이 염세 속 낙천을 말하는 「귀천」의 정수에 해당하는 것이죠.
이룬 것 없이 청춘을 보내고, 살아도 죽은 것 같은 백수생활을 보내는 저에게 현실은 별로 아름답지 못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시궁창 속에서도 내가 나로서 빛날 수 있도록 단련할 수 있고, 그 노력을 알아주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이 시궁창 세상도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다고 그렇게 생각하면서 또 하루를 보냅니다.
연꽃은 그 자체로도 아름답지만, 진흙 속에 피어있기에 더 아름답습니다.
※ 한글맞춤법 부호 개정이 이뤄져 앞으로 말줄임표는 '...'로 표기해도 된다고 합니다. 이건 정말 국립국어원을 칭찬하고 싶은 결정이네요. 이 개정에 맞춰 원 시의 말줄임표를 '...'로 대체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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