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하, 제가 어떻게 하길 원하십니까?"
영화 <남산의 부장들>은 실제 있었던 대통령 암살 사건을 모티브로 만든 작품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대통령을 암살한 사람은 한때 2인자라고 불리었던 최측근 김규평(이병헌)이었다. 도대체 그는 왜 대통령을 암살했을까? 영화는 그 이유를 밝히기 위해 역사의 전모를 고백하듯 차분히 읊어나간다. 그 차분한 서술 사이사이에는 섬뜩한 권력의 실체가 숨어있었다. 나에게는 이 부분이 사건의 결말보다 더 인상적이었다. 솔직히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권력의 실체가 고개를 내밀 때마다 궁금증이 이어졌다. 어떻게 박통(이성민)은 주변 측근들을 자기 마음대로 부릴 수 있었을까? 어째서 측근들은 기꺼이 폭군에게 충성을 바쳤을까? 만약 당신도 같은 궁금증을 느끼고 있다면 한 권의 책을 추천하고 싶다. 스티븐 그린블랫의 책 <폭군>이다.
<폭군>은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바탕으로 권력의 원리를 파헤친다. 셰익스피어가 바라본 독재자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400년 전의 폭군은 지금과 달랐을까? 아니다. 소름돋을 만큼 닮았다. <남산의 부장들>을 보면서 절로 <폭군>의 구절들이 떠올랐다. 너무 잘 맞아떨어져서 황당할 정도였다. <남산의 부장들>은 영화답게 결론을 내리거나 통찰을 제시하지 않는다. 선택은 관객의 몫으로 남긴다. 반면 <폭군>은 권력이 작동하는 원리를 치밀하게 파고든다. 이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통찰을 제시한다. 과연 박통은 어떻게 온 나라를 지배할 수 있었을까? 그 답을 <폭군>을 통해 알아보자.
1) 임자 옆에는 내가 있잖아... 임자 하고 싶은 대로 해
<남산의 부장들> 최고의 명대사를 꼽으라면 나는 곧바로 위 대사를 고를 것이다. 이보다 권력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대사는 없었다. 게다가 이성민의 훌륭한 연기까지 더해져 등골이 서늘한 최고의 장면을 만들었다. 그런데 셰익스피어 작품에서도 이와 비슷한 장면이 등장한다.
"임자 옆에는 내가 있잖아... 임자 하고 싶은 대로 해."
엑스턴 : "내게는 저 살아있는 위험인물을 제거해줄 친구도 하나 없는가?"하고 폐하께서 하신 말씀을 잘 들었겠지?
부하 : 예, 바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엑스턴 : "그런 친구도 하나 없는가?"라고 하셨지. 두 번이나 같은 말씀을 하셨어. 그리고 두 번 다 특별히 힘주어 말씀하셨지.
부하 : 예, 그렇습니다.
엑스턴 : 그리고 그 말씀을 하시면서 내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셨어. "이 위험인물을 자네가 제거해 주었으면." 하시듯 나를 쳐다보셨어. 그 인물이란 폼프렛에 있는 왕을 말하는 거지. 자, 가자. 나는 폐하의 친구다. 내가 폐하의 위험인물을 없애버리겠어.
- 희곡 <리처드 2세> 중
정말 놀랍도록 일치하지 않는가? <남산의 부장들>에서 박통은 가장 위험하고 끔찍한 일에 관해서는 직접 명령을 내리지 않는다. 대신 '임자 하고 싶은 대로 해.'라고 말한다. 일종의 자율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러면 부하들은 충성심을 보일 기회라 생각해 기꺼이 극단적인 방식으로 일을 처리한다. 셰익스피어의 희곡에서도 마찬가지다. 국왕 헨리 4세는 자신이 몰아냈던 이전 왕 리처드 2세를 암살하고 싶지만, 이를 대놓고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엑스턴은 왕의 의중을 짐작하여 자진해서 암살에 나선다. 그렇게 독재자는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가장 더러운 일을 처리한다. 이것이 독재자가 세상을 지배하는 비열한 방식이다.
<폭군>, 31p
2) 각하는 2인자를 살려두지 않아
그렇게 독재자를 대신해 기꺼이 더러운 일을 처리하면 어떤 결말이 기다리고 있을까? 자신의 충성심을 증명했으니 더욱 큰 신임을 받게 될까? 보통 사람이라면 그렇게 행동할 것이다. 도움을 받으면 도와주고 싶어지는 게 인간의 심리다. (이를 상호성의 법칙이라고 한다) 하지만 독재자는 다르다. 독재자는 부하를 이용하고, 부하를 버린다. 토사구팽하듯 2인자를 처단한다. 보통 사람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어둡고 악랄하다.
"각하는 2인자를 살려두지 않아..."
<남산의 부장들>에서는 이런 장면이 2번이나 등장한다. 전 중앙정보부장이었던 박용각(곽도원)이 임무를 완수하자 박통은 난데없이 쉬고 오라고 말한다. 그렇게 박용각은 2인자의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이는 김규평도 마찬가지였다. 김규평은 오명을 무릅쓰고 암살에 성공했지만, 그에 대한 박통의 대답은 과잉 충성이라는 비난이었다.
<폭군>에 등장하는 셰익스피어의 희곡도 완전히 똑같은 결말을 보여준다. 엑스턴은 리처드 2세를 살해하고 보상을 바라며 "폐하, 이 관 속에 폐하의 위험인물을 넣어 현상합니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헨리 4세는 엑스턴을 비난한다. "과인이 그의 죽음을 원하기는 했으나, 그 살인자를 미워하고 오히려 살해당한 자를 불쌍히 여기노라." 이 달곰씁쓸한 아이러니가 독재자에게 충성하는 2인자의 말로이다.
<폭군>에 등장하는 셰익스피어 작품이 쓰인 것은 지금으로부터 400년 전이다. 하지만 그로부터 읽을 수 있는 통찰은 40년 전에 있었던 암살 사건에도, 그리고 현재에도 여전히 유용하다. 또한 국가 규모의 일 뿐만 아니라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에도 적용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분명 리더의 자격이 없는데, 혹은 위험할 정도로 사악한데, 어떻게 그런 사람이 리더가 된 것일까? 그리고 어떻게 조직을, 나아가 세상을 지배하는가? 그 실체를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이 맞이할 미래는 분명 다를 것이라고 생각한다. 당신이 반드시 <폭군>을 읽어야만 하는 이유이다.
※ 본 콘텐츠는 로크미디어로부터 제작비를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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